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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국    [김종성기자] 친일파, 국가보안법 덕을 보다. 2006/09/18
<060919 - 오마이뉴스 김종성 기자>

친일파, 국가보안법 '덕'을 보다
[친일파들의 반민특위 전복과정 ⑤] 친일파가 반민특위를 꺾은 10가지 비결


정상적인 경우라면, 해방공간에서 친일파들은 자신들의 재산을 몰수당하고 인신(人身)의 형벌을 받았어야 마땅했다. 그들을 겨냥한 반민족행위처벌법(반민법)이 제정되고, 그들을 검거하기 위한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까지 구성되었을 뿐만 아니라, 친일파 체포와 반민특위 보호를 위해 특경대라는 특수 경찰까지 설치되었다. 이제 반민특위는 합법이었고 친일파는 불법이었다. 상식적인 경우라면, 합법이 불법을 누르는 것이 마땅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출범(1948년 9월 29일) 9개월도 채 지나지 않아 제1기 반민특위는 와해되고, 반민특위를 반대하던 친일파들이 반민특위 위원으로 취임하였다. 참으로 기가 막히고 어이없는 이런 일이 어떻게 일어날 수 있었을까? 그 같은 기적을 일으킨 친일파들에게는 어떤 노하우가 있었던 걸까? 여기서는 그 노하우 중에서 10가지만 언급하기로 한다.

친일파, 이승만을 자기편으로 만들다

첫째, 친일파들은 대통령 이승만을 우군으로 만들었다. 친일파들은 이승만의 국정 운영에 협력하는 조건으로 그를 자기편으로 만들었다.

그래서 친일파의 수족이 된 꼭두각시 이승만은 친일청산 반대 성명을 수시로 발표하는 한편, 국회특위(국회특별조사위원회)나 반민특위를 끊임없이 압박하였다. 이러한 이승만의 행동은 친일청산세력을 압박하고 친일파들을 단결시켰으며 또한 여론을 교란하는 기능을 수행했다.

반민특위가 아무리 막강한 합법 기관이라 할지라도, 최고 권력자인 대통령까지 나서서 방해활동을 주도하는 상황에서 반민특위가 제대로 기능을 수행하리라고 기대할 수는 없을 것이다.

둘째, 친일파들은 국가 공권력을 최대한 활용했다. 그들은 대한민국 내의 가장 강한 것을 활용하여 대한민국 내의 가장 강력한 적을 무너뜨렸다. 그들은 한민당·정부·검찰·경찰·헌병·법원 등의 권력기구에 포진하고 있던 '동지'들의 역량을 총 동원하여 특위 활동을 조직적·합법적으로 방해했다. 그들은 반민특위라는 미니 공권력을 압도하기 위하여 보다 더 강력한 공권력을 동원한 것이다.

셋째, 친일파들은 반민특위를 빨갱이로 몰아붙였다. 수세에 몰린 그들이 역전승을 거둘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국회프락치사건 덕분이었다. 친일파를 추적하는 반민특위를, 친일파들은 빨갱이라며 역추적했던 것이다. 이른바 '인생역전'이라 할 만한 것이었다. 국회프락치사건은 친일파들이 반민특위를 전복하는 데에 있어서 결정타의 역할을 했다.

반민특위에 '친일파'라는 멍에 씌운, 친일파

넷째, 친일파들은 친일청산이라는 대세를 극복하기 위하여 반공이라는 대응논리를 전면에 내세웠다. 네 번째 이유는 위 세 번째 이유와 중복되는 것처럼 생각될 수도 있으나, 양자는 다른 차원의 것이다. 위 세 번째 경우에는 반민특위와 관련된 것이지만, 여기서 거론하는 네 번째 이유는 일반 대중과 관련된 것이었다. 이들은 대중에게 반공논리를 강제함으로써 대중이 반민특위를 지지할 수 있는 가능성을 차단하려 하였다.

친일청산이라는 대의명분이 지배하는 해방공간에서 친일파들은 반공논리를 앞세워 반민특위의 '전진 공격'을 돌파했다. 반공 논리가 어느 정도 주효했기 때문에, 막판에 그들은 국회프락치사건이라는 '홈런'도 날릴 수 있었다.

다섯째, 친일파들은 전투 역량을 가급적 한 군데로 집중했다. 매 시기마다 가장 강력한 기관을 향해 그들의 십자포화를 퍼부었다. 그러다가 다소 여유가 생기면, '그보다 덜 강력한 기관'을 집중 공격하기도 했다. 그들은 처음에는 국회특위를 상대하다가, 나중에는 반민특위를 집중 마크했으며, 반민특위가 다소 약화되자 국회프락치사건을 벌여 반민특위의 '탯줄'인 국회를 다시 압박했고 그렇게 함으로써 반민특위를 점점 더 약화시킬 수 있었다. 그러다가 최종적으로는 반민특위 소속 특경대를 물리적으로 제압했다.

이 과정에서 그들은 철저한 '프로정신'을 보였다. 그들은 한 치의 인정도 베풀지 않았다. 승리를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친일청산 주도자들을 협박하거나 그들을 공산당으로 매도했으며 또 그들의 직무나 활동을 방해했다. 심지어는 암살도 시도하고 신체적 공격도 거리낌 없이 자행했다. 테러리스트 백민태에게 살생부를 전달했을 뿐만 아니라, 반민특위 호위경찰을 사주하여 특위 요원을 살해하려고까지 한 그들이었다.

여섯째, 친일파들은 반민특위에게 친일파라는 멍에를 씌우려 했다. 친일에는 친일로 맞서겠다는 전략이었다. 그들은 김상돈 특위 부위원장이 일제 때에 총대(동장이나 이장 정도)를 지냈다는 사실을 거론하면서 그를 친일파로 몰아세웠다. 이러한 방법이 지난 2004년에도 여러 차례 사용되었음을 우리는 기억하고 있다.

시위, 테러 통해 대중에 공포심 심어준 '친일파'

일곱째, 친일파들은 대중에게 공포심을 심어 주었다. 끊임없는 물리적 시위와 테러를 통해 대중을 심리적으로 단속했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대중을 심리적·신체적으로 묶어 두었다.

여덟째, 친일세력은 조직·자금·정보 면에서 반민특위를 압도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명분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상황을 반전시킬 수 있었다. 해방 이전의 국민총동원조선연맹의 조직망이 잔존하고 있는데다가, 대부분의 재력가와 국가 기구가 그들의 수중에 있었다. 이러한 절대 열세 하에서 반민특위가 전장(戰場)에 투입된 것이다.

아홉째, 친일파들은 기획력 측면에서 반민특위를 압도했다. 반민특위는 중립적인 사법기관이었다. 그런 퍼스낼리티의 사람들이 교활한 친일파들을 꺾는다는 것은 처음부터 힘든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반민특위가 법에 의거한 법률 집행을 시도했다면, 친일파들은 그런 게임의 법칙에 아랑곳하지 않고 정치적 투쟁의 방식을 사용했다. 친일경찰 등이 주도한 각종 비밀회의에서 친일파들은 반민특위를 친일파로 몰아붙이는 등의 각종 아이디어를 개발해 냈다.

이 점은 오늘날의 친일청산에도 시사점이 되어야 할 것이다. 친일청산 집행기구에게 단순히 법률집행의 기능만 맡길 것이 아니라 독자적인 정책기획 능력을 부여하는 방안 등이 검토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열 번째, 친일파들은 국가보안법의 덕택을 톡톡히 보았다. 국가보안법이 어떤 명분으로 제정된 법이든 간에, 국가보안법은 친일파들이 위기에 몰린 1948년 12월 1일에 태어나 그 이듬해인 1949년에 여러 차례의 국회프락치사건에서 반민특위를 빨갱이로 매도하는 데에 결정적 기여를 하였으며, 그것은 올해로 58세가 되어 있다.

친일파들은 대의명분에서 밀렸음에도 불구하고 이상과 같은 10가지 이유에 힘입어 반민특위를 제압하고 나아가 대한민국의 주도권을 완전히 장악하는 데에 성공하였다.

반민특위로 상징되는 민족정기를 말살한 바탕 위에서, 그들은 일제 때에 벌어들인 재산을 합법적으로 보유하고 한국 사회 곳곳에서 최고 엘리트의 지위를 확보한 채 오늘날에까지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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