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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맨    유엔의권고및국가 보안법 폐지론// 국민의저항권 2005/01/14
노무현 대통령님의 개혁과 인권보호에
의 의지에 환영의 뜻을 표하며, 반인권적인 국가보안법의 폐지를 간절히 요청합니다.

대한민국의 인권개선을 위한 새 정부의 여러 가지 과제 중에서도 국가보안법 폐지는 특히 더 시급하고
중요한 문제입니다.

1948년이래 지난 50여년 간 국가보안법은 수많은 비폭력적 정치·사회 활동가들을 구속하고 방해하여,
양심수를 양산하는 주범이 되어 왔습니다.

특히 "목적수행", "찬양, 고무" 등 모호하게 규정된 국가보안법은 이미 국제사회에서도 비난의 대상이
되었으며, 유엔 인권위원회, 유엔 시민적·정치적 권리 위원회에서는 그 폐지 혹은 관련 조항의 삭제를
계속해서 권고해 왔습니다.

새 정부가 국민의 정치적 참여를 보장하여 정치 개혁을 이루어 내기 위해서도, 국민의 기본적 표현과 결
사의 자유를 침해하는 국가보안법은 즉각 폐지되어야 합니다. 혹은 최소한 문제가 되는 제3조, 제7조 등
이 삭제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제 우리 땅에서 '국가보안법'이라는 단어가 사라질 때가 되었습니다.

국가보안법을 폐지하여 주십시오.
제목 저항권


Ⅰ. 머리말


저항권의 역사는 오래다. 태고적부터 폭군이 존재하는 곳에는 언제나 폭군살해와 폭군방벌이라는 저항권이 뒤따랐다. 이에 상응하여 동서양의 폭군방벌론의 역사도 오래다. 동양에서는 이미 고대에 맹자의 역성혁명론(易姓革命論)이 있었고, 서양에서도 중세 초에 이미 폭군방벌론(暴君放伐論)이 헌법적 제도로서 일반화되어 있었다.
이와 같이 저항권은 이론적으로나 실제적으로나 국가권력이 남용되기 시작했을 때부터 그에 대한 대응권력으로서 존재해 왔던 것이다.

저항권의 존재의의는 현대에 와서도 조금도 감소되지 않았다. 오히려 20세기에 들어와서 폭군들은 '폭정'의 단계를 넘어서 인류역사상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학정'의 단계로 그 폭력의 질을 더 악화시켰다. 집단학살, 인종청소, 인간의 생체실험, 강제노역 등과 같이 인간으로서는 차마 할 수 없는 비인간적 학대가 그 주류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홀로코스트(holocaust)는 아우슈비츠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시베리아의 강제수용소, 캄보디아의 킬링필드, 아르헨티나, 칠레, 우간다, 르완다, 보스니아, 코소보, 동티모르, 북한의 정치범수용소 등 지구 도처에 널려 있다. 20세기는 분명히 인간학대의 반인륜적 시대였다. 자기와 사상이 다르다는 이유로, 자기와 인종이 다르다는 이유로, 자기와 종족이 다르다는 이유로, 자기와 종교가 다르다는 이유로, 자기와 사회계급이 다르다는 이유로, 독재자들은 인간을 학살하고 도살하고 청소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인간을 보호해야 할 국가에 의해 그러한 '인륜에 반하는 범죄'가 저질러졌다는 점에서 국가의 도덕성의 문제가 오늘날처럼 심각하게 논의의 대상이 된 적은 없었다. 국가에 의해 인간이 개처럼 취급되고 개처럼 죽임을 당하는 이 엄청난 반인륜적 범죄로 인하여 '인간의 존엄'이란 말이 오늘날만큼 많은 사람의 입에 오르내린 적도 없다. 그래서 드디어 "인간의 존엄은 침해될 수 없다.

인간의 존엄을 존중하고 보호하는 것은 모든 국가권력의 의무이다"(독일 헌법 제1조)라는 헌법조문이 등장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는 우리나라 헌법 제10조에서도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지니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 국가는 개인이 가지는 불가침의 기본적 인권을 확인하고 이를 보장할 의무를 진다."라고 명시되어 있다.

우리는 인류의 역사에서 저항권에 의한 자유의 혁명을 두 번 경험하였다. 한 번은 18세기 말에 절대군주정의 앙시앵 레짐(ancien r gime)을 쓰러뜨린 프랑스 대혁명이고, 또 한 번은 20세기 말에 동유럽에서 일어난 공산독재정권을 해체한 자유의 혁명이다. 동구권에서는 저항권에 의해 인간이 반세기에 걸친 이데올로기의 노예상태로부터 해방되었다.

공산주의독재에 항거하는 저항의 물결은 유럽의 붉은 대륙을 뒤덮었으며, 루마니아의 차우체스쿠는 폭군살해로서 처형되었고, 베를린의 장벽은 무너졌으며, 기타의 국가에서 이른바 공산당 서기장이라는 폭군들은 모두 그 권좌에서 쫓겨나고 말았다. 이러한 폭군살해와 폭군방벌의 저항권에 의해 공산독재체제는 해체되었으며, 모든 국민은 악마의 질곡으로부터 벗어났으며, 독일은 통일이 되었다.

그러나 유독 북한만이 아직도 이데올로기의 노예상태로부터 해방되지 못한 채 유일한 예외지역으로 남아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오늘날 민족통일의 논의가 한창이며 여러 가지 방안이 시도되고 있다. 그러나 통일의 과제를 해결하는 한 방법으로 저항권을 머리에 떠올리는 사람은 거의 없는 것 같다. 불과 10년 전에 동유럽에서 일어났던 국민의 저항에 의한 자유혁명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으면서도, 모두들 북한에서는 그러한 저항권의 실현가능성은 절대로 있을 수 없다고 단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저항권이 국민의 자유의식과 권리의식이 깨어 있지 않은 곳에서는 절대로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은 진리이다. 그러나 그 반대로 자유의식과 권리의식이 깨어 있는 곳에서는 반드시 일어난다는 것도 진리이다.

만일 이러한 저항권을 통한 통일방법을 고려에 넣는다면 우선 먼저 한 가지 전제조건을 충족시켜야 한다. 즉 북한주민들로 하여금 자유의식을 가질 수 있도록 모든 가능한 수단방법을 통해 자유의 물결이 그 곳에 들어갈 수 있게 해야 한다. 북한을 개방시켜야 한다. 저항을 통해 독일 통일을 가능하게 한 직접적 원인을 동독주민들이 자유세계인 서독의 텔레비전을 마음대로 시청할 수 있었던 것에서 찾은 것은 우리에게 교훈이 되어야 할 것이다.

어느 날엔가 북한주민들이 자유와 인권에 대하여 눈만 뜬다면, 나는 이 지구상에서 가장 캄캄한 인권사각지대로 남아 있는 북한의 노예사회로부터 인간해방과 인권회복이 이루어 질 수 있고, 동시에 통일이 실현될 수 있다는 것을 막연히 관념적으로 소망하는 것이 아니라 그 실현가능성을 확신하는 바이다.




Ⅱ. 자유민주주의 법치국가헌법의 구성원리로서의 저항권


저항권(抵抗權)은 자유민주주의 법치국가의 존립과 운명을 같이한다. 그것은 법치국가헌법을 쟁취, 유지, 회복하는 수단이기 때문이다. 저항권은 법치국가헌법이 아직 마련되어 있지 아니한 곳에서는 그것을 '쟁취'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법치국가헌법이 이미 쟁취되어 있는 곳에서는 그 '유지'를 위한 수단으로서, 또한 법치국가헌법이 파괴되었을 때에는 그것을 다시 '회복'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작용하는 헌법적 구성원리에 속한다.

현대의 법치국가개념은 단순히 법으로써 조직되고 법으로써 지배하는 형식적 법치국가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권력을 법에 구속시킴으로써 인간의 존엄과 가치 그리고 인권을 보호하는 실질적 법치국가를 뜻한다. 이것이 형식적 의미의 법치국가와 다른 점은 2단계에 걸친 정당화를 필요로 한다는 데 있다.

즉 그 법치국가는 첫째 단계로 법에 의해 정당화되고, 둘째 단계로 인간가치에 의해 정당화된다는 점이다. 형식적 법치국가는 제1단계인 법에만 구속되고 그 법이 다시 인간가치에 구속된다는 전제를 알지 못한다. 따라서 비인간적인 법, 즉 인권을 침해하는 악법도 효력을 갖는다. 인권을 침해하는 이러한 악법에 권력이 구속된다는 것은 법치국가개념으로서는 무의미하다.

저항권으로써 쟁취, 수호, 회복하고자 하는 법치국가의 개념은 인간가치에 구속되는 법치국가, 즉 인간의 존엄과 인간의 기본적 인권을 존중하고 보호하는 실질적 법치국가를 의미한다. 이러한 실질적 법치국가는 인간의 실질적 가치를 보호하기 위하여 국가권력을 통제하는 제도적 장치를 헌법의 구성원리로서 자체내에 가지고 있다. 예컨대, 권력분립제도, 헌법재판제도, 행정재판제도, 탄핵제도, 의회제도, 선거제도, 사법권의 독립, 다수정당제도(특히 야당제도),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 표현·비판·반대·시위의 자유 등의 보장이 그러한 것들이다.

이와 같은 헌법상의 제도들은 국가권력을 감시·통제하여 그 남용을 방지하기 위한 것으로서 이른바 '제도화된 저항권'의 기능을 한다. 그러나 이러한 법치국가의 제도가 아직 쟁취되어 있지 않거나, 또는 이미 쟁취되어 있다 할지라도 그것이 명목상의 헌법으로서 현실적인 규범력을 갖지 못할 때에는 '제도화되지 아니한 저항권'이 원용될 수밖에 없다. 케기(K gi)는 제도화된 저항권을 '헌법내적 저항'(intrakonstitutioneller Widerstand)이라 하고, 제도화되지 아니한 저항권을 '헌법외적 저항'(extrakonstitutioneller Widerstand)이라고 부른다.

국가권력을 통제하기 위하여 우리는 최소한 4단계에 걸쳐 차례차례로 원용가능한 저항권을 찾아 볼 수 있다.

1) 법으로써 국가권력을 제한하는 법치국가원칙 일반
2) 헌법파괴의 전단계에서 법치국가헌법을 유지하기 위하여 행사되는 모든 항의와 시위, 비판과 반대권
3) 헌법파괴의 진행단계에서 법치국가헌법을 수호하기 위하여 행사되는 헌법수호권
4) 헌법파괴 후에 법치국가헌법을 회복하기 위하여 행사되는 저항권

이러한 4단계에 걸쳐 차례차례로 행사되는 저항권의 기능과 목표는 동일하다. 즉 그 기능은 국가권력의 남용을 방지하는 데 있고, 그 목표는 법치국가헌법을 쟁취, 유지, 수호, 회복하는 데 있다. 다만 앞의 두 단계는 '헌법내적 저항권' 또는 '제도화된 저항권'이고, 뒤의 두 단계는 '헌법외적 저항권' 또는 '제도화되지 아니한 저항권'이다. 이 양자는 상호보완적 역학관계에 놓여 있다.

즉 헌법내적 저항권이 국가권력에 대한 통제기능을 제대로 발휘하고 있는 한 헌법외적 저항권은 작용할 여지가 없으며, 그 반대로 전자의 저항권의 기능이 약화 내지 상실되면 후자의 저항권이 강화 내지 발동된다. 양자의 관계는 마치 시소(seesaw)와 같은 역학관계에 놓여 있다. 케기(K gi)는 이 점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저항권과 법치국가는 상호역학적 원칙하에 있다. 법치국가의 수위가 내려가면 저항권의 수위는 올라간다. 헌법내적 저항이 기능을 상실하면 헌법외적 저항을 불러들이게 된다. 이 법칙이 더 이상 작용하지 않으면 노예상태로의 길이 열리게 될 것이다.

현대 법치국가헌법은 크게 나누어 두 가지 구성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 하나는 기본권조항인 헌법가치 부분이고, 다른 하나는 그 헌법가치를 보장하기 위한 권력구조의 부분이다. 전자는 헌법의 목적에 해당하고 후자는 그 목적을 실현하기 위한 수단에 해당한다. 따라서 이 두 부분은 권력국가헌법에서와 같이 서로 무관계하게 각각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목적과 수단의 관계에서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법치국가헌법에서 권력구조는 인간의 기본권을 보장하기 위한 합리적이고 합목적적인 수단으로서 민주주의원리와 법치주의원리에 따라 엄격하게 통제되어 있다. 우선 민주주의원리에 따라 권력분립제도, 의회제도, 야당제도, 국민투표제도, 선거제도, 언론제도 등이 권력의 자의성을 제도적으로 배제하고 있으며, 또한 법치주의원리에 따라 권력을 법을 엄격하게 구속시킴과 동시에 규범통제수단으로서 탄핵제도, 헌법재판제도, 행정재판제도 등을 마련함으로써 권력의 남용을 방지하고 있다.

이와 같이 법치국가헌법은 인간의 기본권을 보장하기 위하여 권력을 정치적·법적으로 통제하는 제도적 장치들을 자체내에 가지고 있다. 헌법의 권력구조에 있어서 이러한 권력통제수단들을 가지고 있지 아니한 헌법은 아무리 기본권조항을 금과옥조식으로 나열해 놓았다 할지라도 그것은 가치질서로서의 법치국가헌법은 될 수 없으며 사이비법치국가헌법, 즉 권력국가헌법에 지나지 않는다. 인간가치의 보호를 목적으로 하는 헌법은 반드시 그에 필요한 수단을 자체내에 가지고 있어야 한다. 따라서 이 권력통제수단은 가치질서로서의 법치국가헌법의 필수적인 구성요소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저항권도 법치국가헌법의 이러한 권력통제수단 중의 하나이다. 다만 그것은 법치국가헌법내에 제도화되어 있는 다른 권력통제장치들이 그 기능을 상실했을 때 보충성의 원칙에 따라 최후의 마지막 수단으로 투입되는 권력통제수단이다. 이 최후수단성은 저항권의 조항이 헌법에 실정화되어 있건 없건 그것과는 상관없이 '헌법외적 저항'으로 특징지어진다.

왜냐하면 저항권은 그것이 헌법내에 실정화되어 있는 경우에도 다른 권력통제수단과 함께 작용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헌법내적 저항'이 될 수 없고, 다른 수단들의 작용이 멈춘 때에 비로소 작동하는 것이므로 언제나 '헌법외적 저항'에 속한다. 이와 같이 저항권은 그것이 실정법에 근거하건, 자연법에 근거하건, 헌법 밖에서 인간의 기본권을 보호하기 위한 권력통제수단으로서 법치국가헌법의 내재적 구성원리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Ⅲ. 저항권의 개념과 본질


1. 비판·반대권으로서의 저항권(시민불복종)

법치국가는 헌법상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 및 표현·시위의 자유를 인정하며, 그러한 자유를 통하여 국민은 국정을 비판, 항의, 규탄, 반대하는 것이 허용되어 있다. 헌법에 보장된 이러한 정치적 자유권을 행사함으로써 국가권력의 남용은 예방될 수 있고 그 오용은 시정될 수 있다. 그래서 '예방적 저항권'이라 할 수 있다. 이 예방적 저항권은 법치국가헌법을 전제하며 그 헌법에서 보장된 기본권을 행사하는 것이므로 '헌법내적 저항'에 속한다.

이는 주로 비판, 항의, 규탄, 농성, 반대 등의 시위형태로 나타나는 것이지만, 그것이 전면적 파업이나 폭력적 투쟁형태로 나타난다 할지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헌법상 보장된 자유권의 행사로서 '헌법내적 저항'에 속한다. 이것과 '헌법외적 저항'은 구별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허용된 합법적 폭력과 법률상 금지된 비합법적 폭력의 구별이 여기서 문제되어 있기 때문이다.

헌법내적 저항권은 헌법상 허용된 합법적 폭력행위이며 현존 질서의 합헌성과 정당성을 부인하지 않으며 오히려 그 현존 헌법질서의 보장하에서 그 현존 헌법질서의 유지를 위해 행해지는 것이다. 이와는 달리 헌법외적 저항권은 현존 헌법질서를 부인하거나 파괴하기 위하여 행해지는 것이며, 그 대상은 불법국가이지 법치국가는 아니다. 따라서 법치국가헌법내에서 보장된 비판적 시위권이나 반대권을 행사하면서 '저항권'을 원용하는 것은 법적으로 정당화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개념의 모순이다.

헌법내적 저항과 헌법외적 저항을 그 행위양태에서 구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저항의 행위양태가 폭력적이건 비폭력적이건, 적극적이건 소극적이건, 그것이 '저항상황'에서 행해지면 헌법외적 저항권의 행사이며 비저항상황에서 행해지면 헌법내적 저항권, 즉 비판적 반대권의 행사에 지나지 않는다.

역사적 경험에 의하면 비판이나 반대가 허용되어 있는 법치국가에서는 저항이 오히려 적극적인 시위의 형태로 폭력화하는 경향이 있는가 하면, 그 반대로 그러한 비판이나 반대가 허용되지 아니하는 독재주의체제나 전체주의체제에서는 국가에 의한 강력한 탄압으로 말미암아 소극적이고 비폭력적인 저항이 행해지는 것이 일반적이며, 심지어는 전혀 아무런 저항 없이 강요된 절대복종의 노예상태가 계속되는 경우도 허다하다.

헌법내적 저항과 헌법외적 저항은 그 폭력성과 비폭력성에 따라 구별될 것이 아니라 그 합법성과 비합법성, 그 정당성과 비정당성에 따라 구별되어야 한다. 이 양자의 개념을 혼동하면 불법국가의 비정상적 상황을 법치국가 안으로 끌어들여 저항권의 행사를 일상화시켜 정상상황에서 폭력이 난무하는 무정부상태가 야기될 위험이 있을 뿐만 아니라 비민주적·체제전복적 혁명분자들에 의하여 저항권이 남용되어 법치국가헌법 자체를 파괴하는 우(愚)를 범할 수 있을 것이다.

'법치국가내에서의 저항권'은 '불법국가내에서의 비판적 반대권'만큼이나 모순된 개념이다. 불법국가내에서 현실적으로 비판적 반대권이 허용되지 아니하는 것과 같이 법치국가내에서는 저항권이 허용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항권의 발동을 그와 같이 불법국가내로 국한시키면 거의 그 실효성을 기대할 수 없다는 이유에서 그것을 법치국가내로 끌어들일 것을 주장하는 사람들도 없지 않다. 왜냐하면 일단 독재정권이 확립되어 탄압을 시작하게 되면 저항을 통하여 그 체제를 배제할 가능성은 극히 희박하기 때문이다. 그 때는 이미 때가 늦다는 것이다.

따라서 가장 효과적인 저항은 독재정권이 확고하게 확립되기 전에 행해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경고는 근거가 있다고 본다. 왜 독재정권이 확고하게 틀을 잡아 사실상 저항이 불가능할 때까지 기다리고 있어야 할 것인가. 그것은 로크(Locke)의 말을 빌린다면, "국민으로 하여금 우선 노예가 되고 난 다음에 그들의 자유를 위하여 투쟁하라고 명령하는 것과 같으며, 또한 그들을 쇠사슬로 얽매어 놓고 자유롭게 행동하라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독재정권이 확고하게 틀을 잡기 전에 그러한 상태에 이르지 못하도록 '일상적이고', '작은', '부분적인' 저항이 행해질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법치국가내에서의 이러한 예방적 저항이 불법국가에 대한 보복적 저항보다 더 효과적이라는 데 대하여 이견의 여지는 없다. 그러나 그 저항의 본질은 비판권이나 반대권의 행사이지 저항권의 행사는 아니다.
이 시위·반대권으로서의 저항권은 영미에서는 특히 '시민불복종'(Civil Disobedience)행위라고 한다.
롤스(J. Rawls)는 시민불복종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시민불복종은 공익을 위한 것이어야 하고, 비폭력적이어야 하고, 도덕성에 바탕한 양심적인 것이어야 하고, 그러나 정치적으로 실정법에 위반하는 행위이다. 그리고 이 행위는 통상적으로 법률의 개정이나 정부의 정책결정에 대한 변경을 가져오려는 것이다."

이 시민불복종의 예로서는 미국의 마르틴 루터 킹(Martin Luther King)의 시민불복종운동, 베트남 반전운동, 그리고 구라파의 그린피스(Green Peace)운동, 독일에서의 반핵시위운동, 우리나라에서의 한일협정반대시위운동, 4.19때의 항의시위, 지난번 총선 때 시민단체 등의 낙천·낙선 운동 등을 손꼽을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시민불복종은 헌법내적 저항권에 속한다. 법치국가 안에서의 저항권이기 때문이다. 이것을 법치국가 밖에서의 저항권, 즉 헌법외적 저항권과 구별짓기 위하여 카우프만은 '작은 저항권'(Widerstandsrecht der kleinen M nze)이란 이름을 붙였다.

법치국가내에서도 국가에 의한 불법과 부정의는 있을 수 있다. 순수하게 오로지 법과 정의만이 지배하는 법치국가는 현실적으로는 존재하지 않는다. 법치국가내에서도 개별적으로 나쁜 법률이 있을 수 있고 잘못된 정책결정이 이루어 질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악법이나 잘못된 정책결정은 법치국가에서는 원칙적으로 법치주의적·민주주의적 절차에 의하여 바르게 개정될 수 있고 변경될 수 있다.

이와 같이해서 법치국가는 자신의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한 보완작업을 스스로 해나간다. 그러나 이러한 절차적 정의에 따른 자기수정의 개혁이 이루어지지 않을 경우, 즉 의회나 정부가 그러한 자기수정의 개혁의지를 가지고 있지 않거나 거부하는 경우에는 어떻게 할 것인가? 바로 여기에 시민불복종의 저항이 불가피하게 나타나게 된다.

이러한 현상을 원리적 측면에서 바라본다면, 이 때 국가의 입법의사나 정책결정의사가 국민의 의사와 충돌하고 있는 것이며, 이 충돌을 해소하는 방법으로서 시민불복종이라는 저항수단이 동원되는 것이다. 법치국가가 법을 통한 자기수정과 자기개혁을 거부할 때 주권자인 국민에 의하여 이와 같은 저항이 일어나는 것이다.

법치국가 헌법은 시민의 집회·결사의 자유 및 표현·시위의 자유를 정치적 기본권으로서 보장하고 있으며, 따라서 시민들이 그러한 기본권을 행사하여 국정을 비판, 규탄, 항의, 반대하는 이른바 시민불복종행위를 하는 것을 허용하고 있다. 이러한 시민의 불복종행위를 통하여 권력의 남용은 통제될 수 있고, 그 오용은 시정될 수 있다. 이와 같이 시민불복종은 법치국가의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한 필요불가결한 수단이며 법치국가의 변질을 막는 데 기여한다.


2. 헌법수호권으로서의 저항권

독일 헌법 제20조 4항은 찬탈에 대응하는 저항권을 규정하고 있다.

"이 질서(자유민주주의 헌법질서)를 배제하려고 시도하는 모든 자에 대하여 다른 구제수단이 불가능한 경우, 모든 독일 국민은 저항할 권리를 가진다."

이 저항권은 쿠데타나 혁명에 대응하는 저항권으로서 그 목적은 자유민주주의 헌법질서를 수호하는데 있다. 그래서 이것을 '헌법수호권'(Verfassungsschutzrecht)이라 한다. 여기에서의 저항상황은 쿠데타에 의한 찬탈로 인해 국가권력이 배제되어 있는 '권력진공상태'가 전제되어 있으며, 폭군에 의해 인권이 탄압되는 '권력남용상태'가 문제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 나라의 5·16혁명과 같이 정치문화의 후진국에서 자주 일어나는 군사쿠데타와 같은 것이 그 전형적 예이다.

독일 헌법 제20조 4항에 의하면, 이 헌법수호권으로서의 저항권의 발동요건은 쿠데타세력이나 혁명세력에 대하여 "다른 구제수단이 불가능할 때" 비로소 국민의 저항권을 발동하게 되어 있다. 여기서 헌법을 수호할 '다른 구제수단'이란 군, 경찰, 국회, 정부, 헌법재판소 등의 국가기관에 의한 구제수단을 의미한다. 헌법수호의 제1차적 책임은 국가기관이 지고 있는 것이며 국민이 아니다.

그러나 기습적인 쿠데타나 혁명에 의하여 모든 국가기관의 기능이 마비되어 대응능력을 상실하였을 때 국민이 이 국가기관을 대신해서 헌법수호에 나서 달라는 것이 독일 헌법 제20조 4항의 저항권의 취지이다.

따라서 이 저항권의 본질은 '국가긴급구조권'(Staatsnothilferecht)의 성질을 띄고 있다. 국민은 이 때 '국가의 긴급구조자'로서, '국가를 위하여', '국가권력을 대신해서' 행사하고 있는 것이다. 이 때의 국민의 저항행위를 특히 '헌법긴급구조'(Verfassungsnothilfe)라고 일컫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따라서 이 저항권의 보호법익은 헌법질서의 안전성이며 인권이 아니다. 이 저항상황에서 직접적인 공격대상은 정부이지 인간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헌법수호권으로서의 저항권의 직접적 보호대상은 국가의 기본질서(Grundordnung)이지 인간의 기본권(Grundrecht)이 아니다. 이 점에서 헌법수호권으로서의 저항권은 인권보호권으로서의 저항권과 명백히 구별된다.

헌법수호권의 저항상황은 기존 헌법질서에 대한 쿠데타세력의 공격이 실패하고 다시 정상적인 헌법질서상태가 회복되었을 때, 또는 그 반대로 국민에 의한 저항행위가 실패하고 성공한 쿠데타세력에 의해 새로운 정부가 들어섰을 때 끝난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국민에 의한 저항은 기존 헌법질서의 기능이 잠정적으로 정지되어 있는 기간동안만 행해질 수 있다는 점이다. 정확히 말하면, 이 저항권은 찬탈세력의 헌법파괴행위가 이미 '완료'되었으나 아직 '확정'되지 아니한 기간 동안만 그 실행이 가능하다는 점이다.

이 중간기간은 문자 그대로 '무정부상태'이다. 왜냐하면 쿠데타나 혁명에 의해 기존의 정부는 이미 배제되었지만 아직 새로운 정부가 들어서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정부 없는 중간기간은 국가진공상태로서 법치국가에 속하는 것도 아니고 불법국가에 속하는 것도 아니다. 국가의 기능이 완전히 마비되어 있는 이 기간 동안에는 국가권력의 작용도 완전히 정지되어 있기 때문에 정부가 국가권력을 남용하여 국민의 인권을 탄압하는 일은 생길 수 없다.

그러나 쿠데타가 성공하여 새정부가 들어서면 가사상태에 빠진 자유민주주의 헌법은 마지막 숨을 거둔다. 그런데 그 새로 들어선 정부가 인권을 존중하지 않는 권력국가 헌법을 채택하였을 때에는 그때부터 인권보호권으로서의 저항권은 그 대상을 발견한다.

왜냐하면 그 쿠데타정부에 의하여 인권이 탄압되고 있기 때문이다. 찬탈에 대응하는 저항권과 폭군에 대항하는 저항권은 이와 같이 각각 다른 전제조건과 다른 목표 그리고 다른 대상에 관계되어 있다.


3. 인권보호권으로서의 저항권

우리는 인권보호권으로서의 저항권을 프랑스 인권선언 제2조와 독일 베를린 헌법 제23조 및 브레멘 주 헌법 제19조에서 발견할 수 있다.

1) 프랑스 인권선언 제2조:
모든 정치적 결합의 목적은 생래적이고 불가양의 인권을 보호하는 데 있다. 그것은 자유권과 소유권과 그리고 안전권 그리고 압제에 대한 저항권이다.
2) 독일 베를린 헌법 제23조:
헌법에서 보장된 기본권이 현저하게 침해될 때에는 모든 사람은 저항할 권리를 가진다.
3) 독일 브레멘 주 헌법 제19조:
헌법에서 보장된 인권이 공권력에 의해 헌법에 반하여 침해될 때에는 저항은 모든 사람의 권리인 동시에 의무이다.

이 인권보호권으로서의 저항권은 헌법수호권으로서의 저항권과 구별되어야 한다. 후자는 국가의 객관적인 헌법질서에 대한 공격에 대응하는 것이지만, 전자는 인간의 주관적인 권리에 대한 침해에 대응하는 방어수단이다. 그래서 1793년의 프랑스 헌법 제33조는 "압제에 대한 저항권은 인간의 권리로부터 나온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즉 인권의 방어수단으로서의 저항권도 '인권'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것을 '인권을 방어하기 위한 인권' 또는 '인권을 보호하기 위한 인권'이라고 일컫는다.

원래 법치국가에서 인권의 보호책임은 법치국가의 법질서 자체가 지고 있는 것이지만 그 보호막인 법질서가 국가권력의 남용으로 인하여 파괴되어 버리면 인간 스스로 자기보호를 하는 수밖에 없다.

그것이 인권보호권으로서의 저항권으로 나타나는 것인데, 이 저항권은 헌법질서가 인권의 보호막역할을 하는 '법치국가'(Rechtsstaat)에서는 존재하지 아니하며, 아니 정확하게는 존재할 필요가 없으며, 그 헌법질서에 의한 보호가 완전히 탈락되어 있는 '불법국가'(Unrechtsstaat)에서만 필요한 권리이다. 슈나이더(P. Schneider)에 의하면 "저항권이 설 자리는 오로지 불법국가만이며, 그 불법국가는 인간의 실질적 기본가치인 자유, 평등, 사회적 책임을 존중하지 아니하는 국가를 의미하며, 그리고 이러한 실질적 가치를 보장하기 위하여 마련된 형식적 보호원칙들이 그 의의를 상실한 국가를 의미한다.

독일 헌법재판소의 판결도 이와 같은 취지에서, 저항권은 불법국가를 전제하며 그것은 인간의 실질적 기본가치인 인권이 헌법적 보장 없이 직접적으로 국가의 자의적 권력에 노출되어 있는 국가라고 말한다. 이와 같이 인간이 인간일 수 있는 기본적 조건으로서의 인권이 국가권력에 의하여 총체적으로 침해되는 상황이 여기서의 '저항상황'이다.

이 저항상황은 형식적으로는 법치국가 헌법의 기능이 완전히 배제된 곳에서, 그리고 실질적으로는 인간의 존엄과 가치 그리고 인권이 직접적으로 침해되는 곳에서 발견된다. 이러한 인간가치를 보호하기 위해 그 불법국가를 배제하고 법치국가를 다시 회복하기 위한 투쟁을 벌이게 되는데, 이러한 '인권을 위한 투쟁'을 우리는 '인권보호권으로서의 저항권'이라 부른다.

법치국가 헌법에는 인권을 보호하는 모든 수단들이 헌법내적 저항권으로서 제도화되어 있다. 그러나 이러한 제도화된 수단들이 그 기능을 완전히 상실한 곳에서는 헌법외적 저항권 이외에는 인권을 보호할 다른 수단들이 남아 있지 않다. 법으로써 인권침해를 막지 못하는 한 힘으로써 막고자 하는 것이 저항권의 존재이유이다. 이와 같이 저항권은 보충성의 원칙에 따라 '최후수단'(ultima ratio)으로서만 정당화될 수 있다.

인권보호권으로서의 저항권이 설 자리는 개념필연적으로 불법국가이며 법치국가가 아니다. 왜냐하면 이 저항권의 보호대상으로서의 법치국가는 이미 우리의 눈 앞에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저항권은 헌법수호권과 같이 법치국가를 유지·수호하는 '보수적' 기능을 하는 것이 아니라 불법국가를 배제·극복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그 본질상 '혁명적'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 '혁명적 저항권'은 반드시 '혁명'의 개념과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즉 모든 혁명이 이 혁명적 저항권에 의해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다. 혁명은, 그것이 이데올로기적으로 조건지어진 것이든 단순히 권력정치적으로 동기지워진 것이든, 국가권력을 장악하기 위한 '권력투쟁'(Machtkampf)이 그 본질을 이루고 있지만, 저항권은 국가권력의 남용을 막기 위한 '법투쟁'(Rechtskampf)에 관계되어 있다. 그리고 양자는 다 같이 폭력을 사용하지만 혁명은 권력을 장악하기 위한 '공격적 폭력행위'임에 반하여 저항권은 국가권력의 남용에 대한 '방어적 폭력행위'이다.

따라서 저항권은 국가권력에 의한 공격을 전제하고서만 생각될 수 있지만 혁명은 그 반대이다. 저항에서는 국가권력에 의한 인권탄압에 대한 방어수단으로서의 법투쟁이 문제되어 있으므로 이러한 투쟁에 의해 쟁취되어야 할 헌법질서는 결코 권력투쟁에 의한 혁명에서와 같이 이데올로기적으로 조건지워진 어떤 정치질서가 아니라 이데올로기 비판적으로 기초지워진 인간사회의 기본질서, 즉 인간의 존엄과 가치 그리고 인간의 기본권이 존중되는 법치국가적 헌법질서이다.

이와 같이 법을 위한 정당한 투쟁으로서의 저항은 "이데올로기와는 무관한 하나의 사심 없는 중립적 정치행위이다." 그것은 오로지 '인권을 위한 법투쟁'일 따름이며,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따라서 '자유', '평등', '박애'를 그 이념으로 한 1789년의 프랑스 혁명은 여기서 말하는 '혁명'에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혁명적 저항권'의 전형적 예이다.

따라서 이 저항권의 정당화근거는 인권과 자유, 평등에 바탕한 '계몽적 자연법'이다. 그것은 프랑스 인권선언 17개조 가운데 남김없이 실정화되었으며, 특히 제2조에서 '압제에 대한 저항권'을 '인권'이라고 선언하였던 것이다. 이 인권으로서의 저항권은 18세기 말에 프랑스에서만 필요했던 것은 아니며 20세기 말에 동유럽에서 공산독재체제를 해체하는 데도 필요했던 것이다. 오늘날 우리 지구상의 많은 국가들이 아직도 저항상황에 놓여 있음을 감안할 때 저항권의 잠재적 지배영역은 아직도 크다. 유감스럽게도 우리 나라의 반쪽인 북한도 그 가운데의 하나이다.




Ⅳ. 맺음말


저항권은 국가권력의 남용 또는 오용에 대한 통제수단이다. 그것은 시민불복종으로부터 시작하여 헌법수호권을 거쳐 인권보호권에 이르기까지 차례차례로 단계적으로 이어져 나간다. 이와 같이 단계적으로 이어지는 저항권의 기능과 목표는 같다. 그것은 법치국가 헌법을 유지, 수호, 회복하는 데 있다. 그러므로 저항권은 법치국가의 존립과 운명을 같이하고 있다.

즉 법치국가의 개념 없이는 저항권의 개념도 있을 수 없다. 또한 저항권은 국가권력의 남용 없이는 그 대상을 찾을 수 없다. 그러나 이번에는 거꾸로 만일 저항권이 남용된다면 어떻게 대처해야 할 것인가? 우리는 마지막으로 이 문제에 대해 한번 진지하게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역사적으로 볼 때 우리 인류는 국가권력의 남용만큼 저항권의 남용도 경험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18세기 말에 슐뢰처(A. L. Schl zer)가 한 말은 우리의 주목을 끌기에 충분하다. "저항권에 관한 문제로부터 필연적으로 국가권력을 강화하기 위한 헌법의 문제가 대두되지 않을 수 없었다." 홉스(T. Hobbes)가 절대군주정의 강력한 '리바이어던'(Leviathan)을 탄생시킨 것도 바로 그 당시의 영국의 끊이지 않는 내란상태와 종교전쟁을 종식시키기 위한 역사적 처방이었던 것이다. 홉스에 의하면 저항권의 남용은 "주권자로부터 우리를 보호해주는 수단을 박탈하는 결과를 가져오며, 그로 인하여 정부의 고유한 본질을 파괴한다"고 말한다.

저항권을 무제한 사용하여 국가권력을 약화시키거나 절멸시키면 무정부상태를 초래하여 다시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상태'가 출현할 것이란 경고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 이들의 견해는 국가권력이 남용될 때에는 거꾸로 다음과 같이 옮겨 써야 할 것이다. 국가권력의 남용은 "폭군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해 주는 수단을 박탈하는 결과를 가져오며, 그로 인하여 법치국가의 본질을 파괴한다.

" 따라서 "국가권력의 남용에 관한 문제로부터 필연적으로 저항권을 강화하기 위한 헌법의 문제가 대두되지 않을 수 없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점에 관한 역사적 처방의 예로서는 절대군주정을 저항으로써 타도한 프랑스 대혁명이 있으며, 그 저항권 강화의 헌법적 표현은 인권선언 제2조에 '압제에 대한 저항권'으로 나타나 있다.

우리가 공평한 눈으로 바라본다면, 이 양권력, 즉 국가권력과 저항권력은 서로서로 상대방의 권력남용을 견제하는 '대응권력'으로서 존재해야 할 필연성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오늘날까지 우리 인류가 가지고 있는 국가체제에 있어서 이 양권력의 상위에서 이 양권력의 남용을 통제할 만한 보다 더 강하고 보다 더 높은 권력은 이 세상에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양권력의 상호견제를 통하여, 즉 국가권력의 남용은 정당한 저항권에 의하여 통제되고 저항권의 남용은 정당한 국가권력에 의하여 통제되어야 할 것이다. 하버마스(J. Habermas)가 "시민불복종은 정당성과 합법성의 사이를 떠다녀야 한다"고 말한 것도 이러한 국가권력의 한계와 저항권의 한계가 서로 맞닿는 경계선의 공간을 지칭한 것으로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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