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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국    서양의 마녀재판과 한국의 국가보안법 현상 - 박원순 변호사 2004/09/03
서양의 마녀재판과 한국의 국가보안법 현상
                                          
                                                                    박원순(변호사)
1. 서론

유행은 패션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한 시대와 지역을 휩쓰는 질병이 있다. 이 질병은 단순히
병리학상의 전염병에 그치지 않고 한 시대의 풍조나 생각, 나아가 이념도 포함한다. 중세 유럽과 초기
미국사에 나타나는 이른바 마녀재판은 그러한 질병의 하나였다. 중세 유럽의 역사에서 2백년 이상
장기간에 걸쳐 각지에 전파되고 창궐한 '유행성 마녀병'은 백만이 넘을 것으로 추산되는 선량하고
무고한 부녀자의 재판과 이들 중 대다수의 목숨을 앗아갔다. 자연재해보다 더 끔찍한 인류의
재앙이었다.
그러나 중세 서양사회를 휩쓸었던 마녀재판은 끔찍한 영화의 한 장면으로나 우리는 기억하고 있다. 이
마녀들의 존재와 그들의 혐의를 오늘날 믿을 사람은 별로 없다. 현대인들은 일상생활 속에서 마녀에
대한 현실감을 가지고 있지 않으며 그것은 단지 환상의 영역일 뿐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당시의
유럽인들은 이 마녀들의 존재는 말할 것도 없고 그들의 악행과 위험성에 대하여 절대적인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지만 이러한 무지에 따라 우발적으로 벌어진 현상만을 아니었다. 그 무지와 비이성을
자극하고 조장하며 활용한 집권자들의 추악한 음모와 악의가 자리하고 있었다. 고문자들과 이를 활용한
권력자들의 음모야말로 죄 없는 백만 마녀들에게 죽음을 선사한 것이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 유럽사회를 휩쓸었던 마녀현상이 다른 형태로 재연되어 왔다. '빨갱이'라는 말
한마디로 우리사회에서 소외와 차별, 처벌과 고통을 맛보게 하는 구호였다. 마녀라는 말 한마디로
극한적인 고문과 화형의 고통에 직면해야 했던 많은 유럽인들의 운명과 마찬가지로 '빨갱이'라는 레텔로
국가보안법의 형틀을 맞이해야 했던 비극적 한국인들이 우리 현대사 속에 수없이 발견된다.
중세 서양인들이 마녀의 실재를 믿고 이들의 화형에 의해 사회로부터 영원히 격리함으로써 공동체의
위험을 예방할 수 있다고 믿었듯이 이 땅에서도 대부분의 국민들이 '빨갱이'의 존재와 이들의 사회에
대한 위험성을 믿고 이들이 국가보안법으로 처단되는 것을 지지하거나 방관하는 태도를 보여왔다.
이러한 신념과 태도 때문에 수많은 동시대인이 '빨갱이'로 몰려 '마녀재판'의 희생양이 되었다.

2. 세계사 속의 마녀재판

⑴ 개관

마녀의 역사는 인류의 역사와 함께 한다. 마녀는 가장 오래된 인류 역사의 기록 속에 얼굴을 드러내고
있다. 거의 모든 시기에, 그리고 거의 모든 사람들이 이 마녀에 대한 공포와 신념을 함께 지니고
있었다. 지구상의 거의 모든 종족이 마녀에 관한 전설과 설화를 견지하고 있으며 대체로 이들은 마녀를
처벌하는 법령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마녀신앙이 대규모의 마녀재판과 처형으로 이어진 것은 바로 중세유럽에 이르러서였다.
도대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중세 유럽의 마녀재판으로 희생되었는지 알 수가 없다. '힛벨'이라는
학자에 따르면 독일에서만 수십만 명의 처녀들이 마녀재판의 희생양이 되었다고 한다. '조르단
헤소베'는 전 유럽에서 희생된 사람은 백만 이상에 달할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또 다른 학자는
15세기와 17세기 사이에 마녀라는 죄목으로 화형 당한 사람이 50만 명에 달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유럽의 마녀재판은 영국의 미국식민지에서도 재연되었다. 신천지를 찾아 나섰던 이들에게조차 그
끔찍한 마녀재판이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마녀'라는 이름으로 재판 받지는 않았지만 여러 시대와
여러 사회를 통하여 마녀재판과 같이 한 시대에 한 사회를 광기로 몰아넣은 사례가 적지는 않다. 그
구체적인 내용이 다를지라도 인간의 이성이 마비되고 그 대신 광란의 기세가 휘몰아칠 때는 마녀재판이
보여준 사회 심리적 현상, 수사와 재판의 절차, 그 결과로서의 개인의 희생들이 함께 뒤따랐다. 세계의
마녀 재판사는 바로 인간의 이성과 우상의 쟁투의 역사를 보여주고 있다.

⑵ 중세유럽의 마녀재판

가. 마녀재판의 시작과 전개

원래 마녀는 마녀사냥이 있기 이전부터 존재하였다. 그러나 이때는 마녀라기보다는 주술을 행하는
여자를 말하는 정도였다. 이들은 "신비적 직관에다가 의학적 지식을 가지고 병자를 고치거나 여성의
다산을 돕는다거나 또는 반대로 낙태를 시키는 일"을 하였다. 이것을 사람들의 일상요구에 응하여
존재한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주술사들이 마녀로 낙인찍히고 이단으로 핍박받기 시작한
것은 14세기에 이르러서였다. 이때부터 마녀를 판별하는 지표와 기준이 생겨나고 이들을 집단적인
섹트로서 추적하기 시작하였다.  
14세기를 대표하는 이단심문과 '베르나르 키'는 부부의 불화를 초래하고, 미래를 예언하며, 병을
고치는 자를 주의하라고 촉구하였다. 그 후 교황은 마녀를 최악의 이단으로 처벌하는 것을 이단
심문관에게 허가하는 한편 많은 신학자, 악마학자는 마녀에 대한 공통의 특징, 그 식별방법들을
연구하게 된다. 그 결과 14세기말에는 일종의 마녀교로서 마녀라는 집단의 존재가 자명하게 된다.
그러나 15세기까지 마녀의 소추는 극히 경미하였다. 그러나 1500년경을 경계로 하여 전유럽에 전염병과
같이 마녀의 체포와 재판, 소추가 퍼졌다. 처참을 극한 마녀재판이 유럽을 휩쓸었다.
1484년에는 '마녀소추지침'(Malleus Maleficarum)이 간행되었다. 전자에는 교황이 아직 다수의 마녀가
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소추를 제대로 하지 않고 있음을 개탄하고 있다. 그 3년 후에 퀘른 대학의
신학교사이자 이단재판관의 저작으로 간행된 '마녀소추지침'은 악마에게 영혼을 팔고 마녀가 되는
학설을 망라하고, 마법의 역사를 서술하며 다시 마녀를 발견하고 추적하는 방법을 설명하며 나아가
마녀가 실재하는 이유를 상세하게 연구한 세 권의 서적이다. 이 책은 1869년도에 이미 29판이 출판될
정도로 베스트 셀러였다. 이 책은 점차 그림이 가미되고 나중에는 독일어로 번역이 되기도 하였다.
점차 마녀는 현실적으로 존재한다는 절대적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마녀의 본질을 논하는 허다한
서적이 간행되고, 저명한 법률가가 악마에게 혼을 파는 계약의 성질을 연구하며, 당시의 형법이
마법사를 엄벌에 처하도록 하고 있었다. 이로써 마녀의 실재에 대한 믿음은 말할 것도 없고 마녀를
적발, 추궁하는 것은 관리와 주민의 신성한 의무이기조차 하였다. 이것이 전에 없던 마녀의 박해시대가
열린 큰 배경이었다.

마녀재판이 극성에 이른 것은 16세기 중엽부터 17세기 말 사이였다. 기록에 나타나는 마녀처단의
경과와 사례를 몇 가지 보자.

1582년 바이에른 어느 백작의 한 작은 영지에서 한 명의 마녀가 체포되었다. 이 마녀의 체포에 이어
연속으로 48명이 마녀로 낙인찍혀 화형 당하였다.
1587년 도릴 지방의 약 200여 촌락에부터 15887년부터 이후 7년간 368의 마녀가 적발되어
화형당하였다.
1590년 남독일의 소도시 네르도링켄에서 시장의 제안에 의하여 시의회는 거리를 나돌아  다니는 마녀를
철저히 일소하도록 결의하였다. 이후 3년간 32명의 마녀가 화형 또는 참수되었다.
1590년 소도시 에링켄에서 65명의 마녀가 처형되었고 1597년부터 1676년까지 197명의 마녀가 화형
당하였다.
소소크만텔 僧正領(승정령)에서는 1639년에2,428명, 1654년에는 102명이 처형되었다.  
오늘날 오스트리아 영토가 된 스타이엘마르크 지방에서 1564년부터 1748년까지 1,849명이 소추되어
1,160명이 사형에 처해졌다.
나노수 지방에서는 1629년부터 이후 4년간 2255인이 마녀로 소추되었고 뷔르튄겐 지방에서는 1633년
이후 3년간 11명이 처형되었으며 제롯부르크에서는 1679년에 97명이 화형에 처해졌다.
튜링겐 숲에 인접한 게오르겐탈이라고 하는 인구 4천명에 불과한 작은 도시에서 1652년에서부터 1700년
사이에 64회의 마녀재판이 실시되었다.
반베르크 승정령에서는 1627년 이후 4년간 화형 당한 마녀가 285명이었고 그 이후 30년에 걸쳐 이
재판소에 계류된 마녀재판은 900건을 넘었다. 이 승정령의 인구는 겨우 10만 명을 넘지 않았다.
뷰르스부르크 승정령에서는 1623년부터 1631년간 화형 당한 마녀가 900명에 달하였다. 1627년부터 이후
년간 29회의 재판에서 화형 당한 157명의 희생자를 보면 잡다한 연령과 계급, 직업의 사람들이 혼재해


었다. 시의회 의원, 고급관리 등의 부인, 시의회의원의 처자, 그 지방의 가장 아름다운 자녀 그룹, 8세,
9세, 12세의 아이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후루다에 살고 있는 바루다세르 후스라는 마녀재판관은 19년간 7백명의 마녀를 화형 시켰는데 자신의
일생동안 1천명을 처형하기를 소원하였다고 한다. 로트링겐에 살고 있던 니콜라스 레미라는 사람도 재직
15년간 화형 시킨 마녀가 9백명에 달했다고 한다.

나. 마녀의 개념과 그 특징

일반적으로 마녀는 주변의 주민들로부터  원망과 저주를 받는다. 마녀는 바로 자신들에게 해악을
가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유럽의 마녀재판에서 전형적으로 발견되는 마녀의 행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① 동물과 사람을 죽거나 아프게 하는 일
② 농작물을 해치는 일
③ 생식적 무능을 초래하는 일
④ 태풍을 불러오고 홍수와 가뭄을 초래하는 일
⑤ 버터, 치즈, 맥주의 제조과정에 개입하는 일

인간이나 가축에 접촉하면 병에 들게 하는 방법을 악마로부터 배운 마녀는 바람이나 곤충 등에게
주문을 걸어 곡물이나 과수, 가축 등에 병균을 옮기게 만든다. 마녀가 사악한 눈으로 쳐다보면 그
사람은 미쳐버린다는 것이었다. 이와 같이 마녀는 어떤 행위로서만이 아니라 생각만으로도 해악을
초래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이들의 죄목은 직접적으로 인간에게 해악을 끼치지 않은 경우에도 포함되었다.. 악마와 계약을
맺은 죄, 악마에게 예배한 죄, 악마의 꽁무니에 입맞춘 죄, 빗자루를 타고 하늘을 날아다닌 죄,
불법적인 악마 연회에 참석한 죄, 얼음같이 차디찬 성기를 지닌 악마 인규비와성교를 한 죄, 여성
악마인 서큐비와 성교한 죄 등이 바로 그것이다.
마녀를 가장 간단하게 식별하는 방법으로써 악마학자들은 '눈물의 결여'를 들었다. 즉 악마와의 계약은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는 것을 가장 중요한 내용으로 담고 있다고 한다. 악마와 마녀는 '피의 계약서'를
만들면서 악마는 마녀에게 초자연적인 힘을 주고 마녀는 생애를 통하여 악마에게 복종할 것을 서약한다.
즉 신통력은 악마에게 영혼을 판 대가로 부여받은 것이다. 악마에게 영혼을 파는 방법은 보통 육체적
관계를 가지는 것으로 가능하다. 악마는 남성으로 상징되기 때문에 육체적 교섭을 통하여 그 악마성이
여성인 마녀에게 전달된다는 것이었다. 악마는 보통 멋있는 신사로 변신하여 기사, 상인, 사냥꾼 등의
모습으로 나타나 궁핍한 여성에 접근하며 이들에게 도움을 주거나 감언으로 유혹한다. 마녀는 십자가를
배반하여 예수 그리스도와 마리아, 로마 카톨릭의 어떠한 권위도 부정한다. 이것이야말로 마녀를
핍박하는 도덕적, 사회적 근거가 되었다.
마녀는 생래적이며 기질적인 악마성을 띄고 있다고 보았다. 마녀와 구별되는 것은
여자마법사(Sorcerers)이가. 마녀가 천성적인 것에 비하여 마법사는 마법에 의해 남을 해하 는 천부적
능력은 없고 단지 필요한 기능을 배워 주문을 외운다거나 일정한 의식을 행하는 사람일뿐이다. 영국
법정에서는 마녀가 어떤 죄를 저질렀는가를 중시하였고 스코틀랜드와 다른 대륙국가들에서는 마녀가
악마와 어떤 관계를 가졌는가에 더욱 심리의 초점이 두어졌다. 영국법정에서는 마법사도 구체적인
해악을 끼친 경우 기소될 가능성이 많았다. 그러나
적용현실에서 이 같은 구별은 별로 의미가 없었다. 어차피 마녀든 마법사든 고문과 조작에 의해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마법을 쓰면서도 인간에게 해악적이지 않은 많은 마녀들이 있다는 생각을 지닌 경우도 여러 지역에서
발견된다. 이른바 '흰 마녀'(White Witches)나 마술사(Wizards)등이 바로 그들이다. 이들은 돈을 받고
질병을 고치거나 미래를 예측하거나 잃어버린 재산이나 보물의 위치를 알아 맞추는 등의 노력을 하는
사람들로 분류되었다. 그러나 이들은 언제든지 마녀로 몰릴 여지가 있었다. 먼 마을에서 자주 고객들이
찾아오는 것을 보고 이웃 마을의 사람들은 그녀의 위력을 두려워하여 어떤 재앙에 마을에 찾아오면
그녀를 마녀로 고소하였다. 적어도 마녀재판이 성행하던 시기에는 이와 같이 '흰 마녀'가 안전하게
활동할 여지는 별로 없었다.

다. 마녀에 대한 처벌과 재판

체포와 수사

마녀는 먼저 풍문에 의해 적발되었다. 누구누구가 마녀라고 하는 소문이 나고 이들을 체포하고 이웃의
부합하는 진술에 기초하여 고문에 의해 마녀로 둔갑하게 되는 것이다. 또한 이미 마녀로서 소추 받은
자가 심문과정에 자신이 아는 마녀를 지명하는 경우 체포된다. 그 뿐 아니라 마녀의 자식도 마녀로
간주되었다. 그 자식들은 때로는 고문에 의해 마녀로 조작되거나, 어떤 때에는 고문도 없이 그냥 화형
당하기도 하였다. 이리하여 희생자들 가운데는 시비를 가릴 줄 모르는 유아들이 발견되는 것은 대체로
그들의 모친이 마녀였기 때문이다.
피의자가 수사과정에서 밤중에 집에 있지 않았거나 행선지를 대지 못하는 경우 '마녀회의'에 참석한
근거가 되었다. 고문을 가하는데도 비명을 지르거나 눈물을 흘리지 않는 경우 마녀의 징표가 되었다.
체포되면서 지나치게 놀라는 모습이 마녀의 징표로 여겨지는 가 하면 지나치게 차분한 것도 마녀의
습성으로 간주되었다. 결국 마녀로 한 번 의심을 받게 되면 마녀로 만들어지지 않을 도리가 없었던
셈이다.

규문주의 소송절차

당시에는 이태리 법학과 캐논법을 통하여 유럽 여러 나라가 이른바 규문주의 소송절차를 채택하고
있었다. 이 소송절차에는 고문이 합법화되어 있었다. 마녀는 바로 이 고문의 소산이었으며 이것을
정당화시키고 있는 규문주의 소송절차의 당연한 결과였다. 15-6세기 로마법이 유럽 전역에 전파되기
전까지는 이른바 게르만법계에 속하는 이른바 형식적 증거법주의가 증거법상의 원칙이 되어 있었다.
이에 따르면 요증사실의 진실 여부는 이론상 또는 경험상 도출되는 것이 아니라 주장방법 자체에 의해
결정되었다. 진실은 주장자 자신의 선서, 또는 이웃의 선서, 때로는 결투에 의해 제기되고 인정되었다.
피고인 자산도 마녀가 아니하는 선서, 이웃의 선서에 의해 형벌을 면할 수가 있었지만, 마녀인지 여부는
수족을 묶고 수중에 던져 보아 가라앉으면 결백한 것이 입증되곤 하였다. 그러나 그 결백이 입증되었을
때에는 이미 산 사람이 아니었다.
15-16세기경 로마법이 전래되면서 이른바 논리증거주의가 채용되었다. 요증 사실의 진실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경험상 논리상 진실인 것을 확신시키기에 충분한 증거자료의 존재를 필요로 하였다.
1532년 제정되어 18세기말까지 독일 보통법이었던 카톨리나 형법의 증거원칙에 의하면 유죄의 증거로서
피고인의 자백 외에 2인의 증인의 증언이 필요하였다. 그러나 이에 위하더라도 법률에 정하는 정도의
정황증거가 있는 경우에는 고문에 의한 자백이 허용되어 이것이 마녀의 양산에 별다른 통제가 될 수
없었다.

고문

위와 같이 고문은 거의 모든 마녀재판의 필수적인 한 요소로 등장한다. 마녀는 결국 고문의
소산이었다. 물론 희귀한 사례가 없지는 않았다. 어떤 소녀는 자신이 마녀임을 아버지에게 자백하고
아버지가 딸을 신고하여 마녀재판에 등장한 경우도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건에서 마녀들은 자신이
마녀라는 사실을 부인하였다. 그럴 경우 위에서 본 마녀의 징표들을 들이밀며 마녀라는 사실을 시인할
것을 강요한다. 그 강요의 수단이 바로 고문이었던 것이다.

이 당시 행해진 고문은 그야말로 "인간의 지혜를 모두 동원하여 만든 것으로써 필설로 설명하기 어려운
정도"였다. 건강한 남자조차 견디기 어려운 정도의 고문이 연약한 여성에게 가해질 때 심문관이
요구하는 내용의 진술을 자인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을 터이다.

형량과 집행

기독교가 절대적인 권력을 가지고 있을 당시에는 신에 대한 반역이나 모독은 그 어떠한 범죄보다
중죄였다. 신의 적인 악마에게 영혼을 파는 행위란 있을 수 없었다. 처음에는 마법의 유형에 따라 달리
취급하였지만 나중에는 마녀라는 것 자체만으로 화형, 참수, 교수 등의 엄벌을 받았다. 독일, 영국,
프랑스, 스위스, 핀란드, 스페인 등지에서 일어난 마녀재판을 1만 건 이상 분석한 로버트 무쳄블래드의
통계자료에 의하면 마녀로 기소된 사람가운데 거의 반이 처형된 것으로 보인다.

라. 마녀재판의 소멸

그러나 수세기에 걸쳐 광란을 연출하였던 마녀재판도 18세기에 들어서면서 점차 그 모습을 감추기
시작하였다. 르네상스의 진전과 더불어 이성적 세계관과 과학적 정신의 대두는 불가피한 시대정신이
되었고 이것은 신학에 기반한 과학의 해방을 의미하였다. 이로써 불합리를 극한 마녀재판도 존립의
근거를 잃게 되었다.
마녀재판과 투쟁한 사람들이 마녀재판이 극성을 부리던 그 시대에도 없지는 않았다. 아그립파 후안,
네소데스하임, 프리드리히 후안 수베 등은 "인류의 문화가 오래 기억해야할 인물"들이었다. 그러나 가장
용감하게 마녀의 존재를 부정하고 마녀재판의 종식에 큰 공적이 있는 학자는 대학교수였던 크리스챤
토마지우스였다. 그는 1701년 '마법의 죄'라는 유명한 책을 간행하였다. 그 이전의 학자들의 견해는
수용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악마의 원조자가 박해받을 수 있었기 때문에 그 저술들도 익명으로 남아
있는 상태였다. 그러나 토마지우스는 합리적인 시대정신의 선두에 섰을 뿐만 아니라 그 이전 학자들의
견해마저 수용하여 그 책을 간행할 수 있었다.
18세기를 지나면서 마녀의 고문과 그에 따른 화형도 사라졌다. 독일의 경우 1749년에 뷰루소부르크에서
1건, 1751년 아인팅겐에서 1건, 1775년 겜텐에서 1건의 마녀재판이 기록되고 있고 그 7년 후인 1782년
스위스의 게랄스라는 지방에서 아인나 겔티라는 마녀가 고문 끝에 참수형에 처해진 것을 끔으로
마녀재판은 유럽대륙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⑶식민지 미국 뉴잉글랜드의 마녀재판

가. 개관

"우연한 여행자의 눈으로 보면 17세기 식민지(미국)에서의 삶은 좋았다. 비록 물질적으로 아직
곤궁하였지만 미국인의 노고는 셋집에 사는 영국의 도시인이나 농노에 다름없는 농민의 그것보다는 훨씬
나았다. 숲에서 매일 새로운 통나무집이 섰고 바다로부터 땅의 경계는 내륙으로 확장되고 있었다. 땅은
풍부하였고 비옥하였다. 구세계로부터 버림받은 자들이 새롭게 시작하고 있었다. "

이 아름다운 신세계에 부푼 꿈과 자유에의 소망을 안고 빈곤과 핍박과 절망의 유럽으로부터 도착한
사람들에게 기다리고 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인디언과의 전쟁, 자연의 재해와 위력만이 이들을 괴롭힌
것은 아니었다. 자유를 찾아 나선 이들에게 자유를 속박한 것은 바로 자신들의 이웃이었다. 더 정확히
말하면 내면의 의식이 바로 가장 무서운 적이었다. 이웃을 마녀로 몰아 소동이 일고 마침내 마녀재판의
선풍이 이 신세계를 휘몰아쳤던 것이다.
광대 무변의 신대륙에서의 생활은 개척자의 일상활동을 모두 미신적 환경으로 둘러쌌다.
유럽대륙에서 막 싹트기 시작한 과학적 사고는 전혀 이곳으로 파급되지 않았다. 유럽에서 세분화된
마녀, 주술사, '백색마녀' 등의 구별은 신세계에서는 단지 "악의 어둠 속에서 일하기로 선택된
사람"으로 단순화되었다. 그러나 미국에서 마녀에 재한 형벌은 유럽과 마찬가지로 가혹했지만 마녀를
처단하는데 훨씬 신중하였다. 살렘재판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식민지의 분위기는 1백만 명을 처형한
유럽의 15세기에서 18세기에 걸친 히스테리에 전염되지는 않았다. 인명을 그렇게 허무하게 살상하는
것은 인구밀도가 희박한 미국 땅에서 사회적 경제적 낭비로 간주되었다.
미국 식민지의 초기 법률은 마녀에게 사형이 부과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었다. 미국에서 마녀고 사형
당한 사람은 모두 36명이었는데 그 가운데 24명이 살렘에서, 그것도 1692년 한해에 처형되었다.
1692년 이전에고 영국 이주민의 초기 정착지였던 뉴잉글랜드 지방에서 개별적으로 마녀재판을 받았던
사건들이 있었다. 1658년, 1662년, 1665년에 각각 마녀재판이 있었다. 1688년에는 보스톤의 죤
굿윈이라는 아이가 몹시 아팠는데 그 집안의 하녀의 어머니 글로버가 마녀로 기소되어 처형되었다.
띄엄띄엄 있었던 이러한 마녀재판의 광기가 살렘마을에서 집중적으로 폭발되었던 것이다.


마녀재판이 성행한 뉴잉글랜드 지방은 청교도들이 집단적으로 이주한 곳으로서 일체감을 가지고 있었다.
보스톤의 가장 유명한 성직자 코튼 마더라는 마녀가 악의 사신이며 하느님과 선택된 인종, 청교도들을
파멸시키기 위하여 보내진 것이라고 강연하고 다녔다. 마녀소동은 이러한 위기의식에서 비롯되었다.
그러나 1700년대 중반에 이르러 대서양 양안을 지배하고 있던 영어사용민족이 모두 마녀의 존재를
부인하였다. 영국에서의 마지막 처형 희생자는 11722년 옆집 돼지와 양에게 저주의 말을 던졌다는
이유로 화형을 당한 스코틀랜드 여자 도노크였다. 영어사용권역에서 마녀로 마지막 처형된 것은 1730년
버뮤다의 흑인노예 사라 바세트였다. 1736년에는 킹 제임스법은 공식적으로 폐지되었고 영국시민에 대한
마녀 기소는 금지되었다. 그러나 식민지법은 자동적으로 이에 다른 것은 아니어서 1768년까지 로드
아일런드는 기소된 마녀에게 교수형을 가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지 않았다. 18세기까지 마녀재판이
지속된 다른 유럽국가에 비해 영국과 미국의 경우 비교적 빨리 그 비극이 종료되었지만 미신은
하루아침에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마녀재판 시대는 역사속으로 흘러
들어갔고 초자연적 세계는 단지 호기심으로 대체되었다. 새로운 미국이 독립국으로 탄생하면서 식민지
시대의 마녀재판은 매우 단순한 시대의 거의 잊혀진 기억으로만 남게 되었다.

나. 살렘 마녀재판

살렘 마녀재판의 히스테리는 1692년 미국의 메사추세츠 주에 위치한 살렘이라는 조그만 마을에서
일어난 일련의 사건과 관련하여 마녀로 지목된 사람들의 기소와 재판에서 연출되었다. 처음에는 몇 명의
소녀들이 시시한 미신놀이를 즐긴 일에서부터 시작되었다. 마을의 목사였던 사뮤엘 페리스의 딸 9살짜리
베티와 그녀의 사촌 11살의 아비가일은 겨울이 되면서 주로 실내에서 서인도 출신의 노예 티투바로부터
바베도스 설화와 마녀 이야기를 들으며 재미있게 놀곤 하였다. 그런데 위 두 아이가 아프자 아버지
사뮤엘 페리스는 동네 의사에게 보였고 중세적 사고에 젖어있던 의사는 병의 원인을
발견하지 못하자 사탄의 악령이 깃들어 있다고 진단하였다. 뿐만 아니라 아이들이 실어증에 걸리거나
경련을 일으키거나 중얼거리는 증세를 보이기도 하였다. 그들을 괴롭히는 사람의 이름을 대라는 요구에
아무런 대답을 않던 이들이 나중에는 티투바와 사라 굿, 사라 오스본 세 사람의 이름을 댔다. 이들에게
구속영장이 발부되었다. 그 이후 더 많은 사람들이 이상증세를 보인 아이들의 입에서 언급되었다는
이유로 기소되었다. 뿐만 아니라 마녀 소동은 이웃마을로 확산되어 안도버 마을에서만 해도 50명 이상이
기소되었다.
심문도중에 치안판사는 여러 종류의 증거에 의존하였다. 가장 중요한 직접증거는 피의자들의
자백이었다. 미신적 속성, 특히 육체적 특징으로서 '마녀흔적'이 증거가 되었다. 그 피의자의 특이한
신체적 특징이 마녀의 징표로 간주되었다. 또한 이들에 의해 이루어진 초인적 행태들, 예컨대 도저히
들기 불가능한 하중의 물건을 들어올렸다는 등의  사실이 마녀의 증거로 제시되었다. 상해, 질병,
재산상의 손실 등이 악마적 힘을 가진 마녀라고 단정할 신뢰성 있는 증거라고 보았다. 브리제 비숍이
처음 교수형을 당한 이래 순식간에 수십 명의 처형이 실시되었다. 살렘 지역에서의 마녀재판은 24명의
처형과 200명 이상의 구금으로 연결되었다.

재미있는 사실은 하바드 대학과 그 졸업생이 이 희대의 재판에 깊이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이
재판의 과정에서 마녀재판을 한  10명의 재판관 가운데 3명, 재판을 받은 마녀, 그리고 그 재판이
문제가 있다고 여론을 환기시켰던 사람, 마녀가 탈옥하는데 도운 사람이 모두 하바드 대학 출신이었다.
특히 하바드 대학의 학장이었던 인크리즈 마더는 이 재판에 의문을 제기하는 저서를 내어 마녀재판에
대한 올바른 여론을 환기시켰다. 마더의 아들을 포함하여 여러 사람이 비슷한 논조의 책을 폈다. 1692년
9월 22일 실시된 처형을 마지막으로 살렘에서의 마녀소동은 진정 국면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이 마녀재판이 오판이었음을 후회하는 사람이 늘어갔다. 법원과 교회가 그 당시 행해진
부정의에 대하여 사죄하는 기도의 날을 선포하였고 1696년 그 재판에 관여한 12명의 배심원은 참회의
성명에 서명하였다. 그 다음해 1월 14일 마녀재판의 재판관이었던 사뮤엘 새월은 교회에서 공개적으로
수치스런 오판을 자인하고 용서를 빌었다. 마녀라고 물고 늘어져 여러 희생자를 낳았던 사람 가운데도
악마에 씌워 그런 죄악을 저질렀노라고 참회하는 사람이 생겨났다. 1711년에는 생존자들이 제기한
재심이 인용되었고 배상의 판결이 내려졌다. 살렘재판의 희생자 유족 전원에게 유족들이 요청한 배상액
전액이 그대로 인용되었다. 살렘 마을은 새로이 부임한 목사의 헌신적 노력에 의해 다시 화해와 부활의
기운을 맞았고 마침내 정상적인 마을로 되돌아갔다.  
이 황당한 사건에 대한 연구도 계속되었다. 많은 학자들은 당시 농경사회에서 산업사외로 전이하면서
생겨난 정치적 사회적 불안이 의심의 기후를 조장하였고 마침내 라이벌 집단을 마녀로 고발한 것이라고
해석하고 있다 살렘지역은 조선과 항해의 중심지로 등장하면서 아직도 농경지역으로 남아 있던 곳과
갈등을 일으켰다는 것이다. 서녀들의 감정적 격앙이 어른들에 의해 과장되었고 이 지역의 버섯이 신체적
경련과 장애를 일으켰으리라는 분석도 있다. 이 소동을 어떻게 설명하든 살렘재판은 살렘사회, 나아가
미국사에 큰 오점으로 남았다.

3. 한국의 국가보안법 현상과 마녀재판

가. 개관

"만약 우리들이 살고 있는 이 시대에도 마녀재판과 꼭 같은 방식으로 마녀를 발견하는 방법을 적용하면
당시와 마찬가지로 많은 마녀를 적발하고 화형을 처할 수 있다. 그 방법이란 극단적으로 간단하게,
확실하게, 신속하게 목적에 도달시키는 것이다. 한마디로 말하면 무엇이 되는가. 그것은 인간의 죄악
가운데 가장 愚劣(우렬)한 소산, 고문 외의 아무 것도 아니다."

어떤 서양학자가 한 이 말이 바로 이 땅의 현대사에서 재연되어온 것은 우연의 일치일까? 우리 시대에
존재하였던 수많은 '빨갱이'라는 말만으로도 고문이 용인되고 정당한 형사절차의 예외가 될 수 있었다.
언론도, 국민도 그러한 것쯤은 용인하였다. 이러한 방조와 방관 사이에 '빨갱이'에 대한 선동과 조작이
판을 쳤다. 억울한 희생이 잇따를 것임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그러지 않아도 사회일각에서는 과격한 좌경용공세력이 민주화라는 가면아래 자유민주주의 자체를
부정하고 폭력과 불법과 선동으로 공산주의 세상을 세우겠다고 준동하고 있지 않습니까? 본인은
자유민주주의체제를 전복하려는 폭력좌경세력을 엄정하게 다스리고 전환기에 해이해 지기 쉬운
사회기강을 엄격하게 확립함으로써 국가를 튼튼히 다져나갈 것입니다."

"현정권은 이사건 수사의 초기부터 매스콤을 동원하여 편향보도로 왜곡했다. 나는 말로 다할 수 없는
정신적, 육체적 고문을 당했다. 그들은 나를 구타하고 매달아 물고문을 하고 온갖 모욕과 협박을 했다.
… 내가 용공, 불순세력이요, 좌경의식을 가졌다는 말을 정치권력이 만들어낸 것이다. 나는
관제빨갱이일 뿐이다. 빨갱이라는 누명만 벗겨준다면 나는 최후진술을 하지 않을 용의도 있다.
민주주의를 부르짖는 것이 어찌 빨갱이인가? 우리 나라의 정치학 사전에 '빨갱이란 반독재
민주주의를 부르짖는 애국자를 독재자가 남용해서 붙인 이름' 라고 기재해야 오해가 없을 것이다."

민주주의를 사이에 두고 벌어진 이 같은 논쟁은 차라리 전쟁이라고 부를만하였다. 이른바
'용공조작'의 거센 바람은 지난 반세기의 현대사를 황폐하게 만들었다. '빨갱이'라는 말 한마디로
얼마나 많은 사람이 자신의 운명을 뒤바꿔야 했는지 모른다. 더러는 처형되기도 하고, 감옥에 가기도
하고, 때로는 직장을 그만두어야 했다. 그 가족은 '빨갱이'가족의 레텔을 부치고 살아가야 했다.
정치.사회 영역은 말할 것도 없고 자율성과 자존심이 존중되어야 할 문학.학문.예술의 모든 영역에
국가보안법의 잣대를 들이밈으로써 자유로워야 할 상상력과 창작성이 소진되었다. 국가보안법 현상은
중세의 마녀재판과 너무도 많은 점에서 유사점을 발견하게 된다. 그 주술과 공포 속에 우리가 살아온
것이다.

"빨갱이라는 말은 주술화되어 그 말을 뒤집어쓴 자는 저주받은 사탄처럼 증오와 공포의 대상이
돼버렸다. 아직도 이 땅에서 빨갱이라는 말은 그 역사적, 사회과학적 의미의 조명은 무시된 채 신화
속을 악령처럼 희생제물을 찾아 도처에서 배회하고 있는 것이다."

도처에서 배회하고 있는 '악령'에 의해 '희생의 제물'로 선택된 사람들이 너무도 많다. 유럽의 중세
하늘을 날아다녔다는 이유로 화형대의 연기로 사라져야했던 마녀들과 이 땅의 저주받은 자로 수난을
치러야 했던 국가보안법 위반자들의 유사점은 무엇인가.

나 . 국가보안법과 마녀재판의 유사점

너무도 기나긴 시간과 공간의 차이를 가진 중세 서양의 마녀재판과 한국 현대사 속의 국가보안법
재판은 기가 막힐 정도로 유사성을 지닌다. 그것은 권력이 무력한 개인들을 희생양으로 하여 자신의
정치적 목적을 달성해 가는 과정이라는 동일한 양상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그 유사성의 몇
가지 단면만 간략히 살펴보기로 한다.

①'중죄'의식과 공정절차의 실종

국가 보안법 사건은 국가와 사회에 대한 도전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에 국민 공동의 적으로 처단되어야
한다는 논리가 지난 시대 지배하였다. 국가보안법 사건이 중대사안이며 중죄라는 인식은 곧바로 수사 및
재판기관에서의 특별취급을 낳았고 그것은 곧바로 통상 사법절차의 해제와 엄벌주의를 낳았다. 헌법과
형사소송법이 규정하는 피고인보호를 위한 각종의 장치는 국가보안법 사건에서는 해제되었고 적부심과
보석, 집행유예는 국가보안법 사건에는 대치로 해당이 없었다.
마녀재판은 이미 설명한대로 신의 모독과 기독교에 대한 배반, 악마와의 거래로 간주되었기 때문에
가장 중한 되로 취급받았다. 엄정한 증거가 필요한 로마법 전수 이후에도 법률가들은 그 예외로 마녀에
대한 고문과 이로 인한 자백증거를 허용하였다. 일반 사건에는 허용되지 않는 고문의 반복이 마녀에게
가해졌고 마녀소추를 담당하는 자들은 마녀에 대한 예외적 법률해석에 따라 충실하게 그 직무에
종사하였다. 국가보안법이든 마녀사건이든 체제자체를 부정하고 전복하는 중죄라는 생각은 바로 대량의
희생자와 극단적인 피해를 초래한 것은 물론이고, 나아가 정당한 재판절차마저 유린하는 근거와 배경이
되었다.

② 고문의 상용

마녀라고 고백한 고백서는 많지만 자신이 정말 마녀라고 자인한 마녀의 사례는 역사 속에서 실제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그 고백서는 결국 엄청난 고문에 의해 만들어진 고문의 부산물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다. 빗자루를 타고 하늘을 날아 악마회의에 참석하였다는 자백을 하기까지 이들이 얼마나 심한
고문을 받았겠는가? 고문은 마녀로 심문받는 피의자 본인뿐만아니라 그 고문의 과정을 통하여 가족과
이웃의 또 다른 희생자를 불러오게 마련이었다. 누가 자신을 마녀로 안내하였고 어떤 마녀들이 이웃에
있으며 '악마연회'의 참석자들을 대라는 수사관의 요구와 고문은 곧바로 수십 명의 연쇄적인 마녀가 그
피의자의 입에서 올려질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었다. 다음은 1601년 오펜부르크라는 지방에서 있었던
일이다.

"방랑 여인 두 사람이 고문에 못 이겨 자기들이 마녀라고 자백했다. 악마의 연회에서 본 사람을 대라는
협박에 그들은 빵 제조업자의 아니 엘제 그빈너의 이름을 댔다. 수사관들 앞에 끌려간 엘제 그빈너는
마법에 대해 아는 바가 없다고 완강히 부인했다. … 세 번째 매달려졌을 때 견디지 못해 그녀는 고함을
질렸다. 그녀는 다시 땅에 내려졌고 악마와 사랑을 즐겼다고 고백했다. 수사관들은 이에 만족하지 않고
더 많은 자백을 강요했다. … 그러는 동안 수사관들은 엘제의 딸 아가테를 잡아 왔다. 그들은 아가테를
감방에 쳐넣고 자신과 어머니는 마녀이고 빵 값을 올리기 위해 농작물을 망쳤다는 자백을 할 때까지
매질을 했다. … 종국에 가서는 그녀는 악마애인의 두 날개를 타고 악마연희에 참석했다고 고백했다.
그러자 수사관들은 그 연회에서 얼굴을 본 자들의 이름을 대라고 강요했다 엘제는 두 사람, 스피이쓰
부인과 웨이쓰 부인의 이름을 말했다. 1601년 12월 21일 그녀는 화형 당했다.
국가보안법 사건도 고문과 친한 범죄이다. 특히 간첩사건이나 조직사건은 거의 예외 없이 고문 피해의
호소가 따른다. 고문은 자백을 낳고 자백은 무고한 가족과 동료의 연쇄적 구속을 가져온다. 이른바
불고지죄까지 쳐서 한 간첩사건은 수명에서 수십 명의 구속을 부른다. 때로는 한 집안의 패가망신을
초래한다. 이른바 '송씨 일가'사건은 전형적인 예이다. 한 월북한 가족 때문에 충청도의 한 송씨 집안은
수십 명이 구속되고 장기형을 선고받음으로써 절단이 나고 말았던 것이다.

③ 수사관의 협박과 법정의 진실

-마가레트, 그대는 자유의지에 따라 고문으로 되어진 자백을 추인하겠는가?

"견딜 수 없는 고문을 받고 자백할 때, 수사관은 그녀에게 말했다. '만약 자금까지 자백한 것을 부인할
의사가 있으면 지금 나에게 말하라. 그러면 내가 더 유익하게 하겠다. 만약 당신이 법정에서 그 사실을
부인한다면, 당신은 다시 내 손아귀로 돌아와 이제까지 보다 더 지독한 꼴을 보게 될 것이다. 나는
돌에서 눈물이 흐르도록 할 수도 있다.' … 마르가레타가 법정에 끌려갔을 때는 그녀의 발에 족쇠가
채워져 있었고 손에는 포승이 묶여져 피가 배어 나올 지경이 되었다. 그녀의 옆에는 간수와 수사관이
서있고 그 뒤에는 경비대가 무장을 하고 서 있다. 자백서가 낭독되면, 수사관은 그 자백서를 추인할
것인가 그러지 않을 것인가를 묻는다."

"검찰에서는 사실의 진상이 드러나 저의 억울함이 밝혀질 것으로 믿었기에 나를 죽이겠다고 고문하던
수사관들이 검찰에 마저 따라와서 저의 진술을 감시하고 있었으나 저는 조서내용은 고문과 폭행에 의해
꾸며진 것이라고 주장했던 것이다. 그런데 건사는 부인하면 보안대에서 부인하지 왜 여기서 부인하느냐,
조서내용대로 시인하지 않으면 다시 보안대로 돌려보내서 죽여버리도록 하겠다, 너는 재판을 않고도
죽여버릴 수 있다., 평생 감옥에서 못 나오도록 하겠다며 양쪽 뺨을 후려치고 발길질을 하는데 … 이
같은 검사 행위는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놀라움이었고 무서움이었으며…"

④ 자백의 증거

마녀사건에서 어짜피 증거란 자백과 이웃의 증언뿐이다. 악마연회에 참석한 증거, 농작물을 망친
증거가 어디 있겠는가. 마녀 피의자 본인의 자백과 그녀의 평소 언동이 수상했다는 이웃 사람들의
진술이 보강증거가 되어 유죄판결의 기초가 되었다. 결국은 자백이 마녀로 만드는 지름길이 되었다.  
국가보안법 사건도 마찬가지다. 많은 조작 간첩사건의 경우 탐지하고 수집하였다는 국가기밀이 대체로
신문에 난 것이었거나 상식에 속하는 내용이었다. 간첩의 증거로 제시된 것은 흔한 라디오 등에
불과하였다. 가장 중요한 증거는 여전히 피고인 자신의 자백이었다. 많은 경우 함께 잡혀온
상피고인들의 진술이 상호 보강 증거가 되었다. 결국 고문에 의해 획득된 자백이 다른 고문에 의한
자백을 보강하는 셈이었다.

⑤ 이욕적인 기술자로서의 고문수사관

마녀 사냥꾼들은 마녀들의 공급을 원활하게 하는 데 노력했고, 그로 인해 실제 마녀들이 존재하고, 또
어느 곳에나 존재하고 있으며, 그들은 위험스러운 존재들이라는 신앙을 퍼뜨리는 데 노력했다는 가정은
아주 분명한 증거에 기초하고 있다. …(마녀들의 재산몰수, 고문과 처형비용의 청구 등) 보상들의
존재는 마녀사냥 기술자들이 광적으로 맡은 바 일을 하였던 까닭을 밝혀주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최경조 대공처장은 박정희의 5.16 군사 쿠테타를 기념하는 5.16민족상 보안부분의 수상을 목표로
심사회에 제출할 자신의 업적 목록 작성을 수사과의 내근에게 명령했다. 최경조가 체포한 간첩은
60여명에 이른다는 책자가 만들어졌다. 그 안에는 나의 이름도, 서성수 형, 박박 씨, 허철중 군도
사진이 첨부되어 들어가 있었다. 최경조의 5.16민족상 수상 축하연으로 이 해의 봄은 끝났다.  …
주빈석에는 멧돼지 한 마리가 구워진 채로 눕혀져 있다. …멧돼지의 모습에 나는 연민을 느꼈다. 귀가
잘리고 배가 갈라져 술안주가 되어 사나이들의 위장으로 들어가는 멧돼지의 모습이 서성수 형이었고
나였고 허철중 군과 박박씨, 이종수군, 그리고 헤아릴 수 없는 동포들의 모습과 겹쳐졌던 것이다.
우종일이 그리고 오희명이 건배를 선창했다. 위하여! 대 수사과의 더욱 큰 발전과 성과증진을 위해,
위하여."

마녀재판에서나 국가보안법 사건에 있어서나 등장하는 것이 직업적인 고문전문가들이다. 이들은 고문을
통하여 마녀나 빨갱이를 만들어내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재산적 이득과 승진 등 자신의 이익을 위해
다른 사람을 희생양으로 삼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이들은 교묘한 고문과 심문의 기술을 발전시켰고
법정에서 유죄를 확보하기 위한 능란한 방법들을 고안해 냈다. 이방면에서 하나의 '기술자'였다.
역사상 가장 뛰어난 고문전문가의 한사람을 1578년부터 1617년까지 뉴른베르크에서 고문리로 근무한
프랑크 슈미트라는 사람이다. 그가 남긴 일기장에는 361명의 처형과 345명의 죄수에 대한 고문이
기록되어 있으나 이것은 그가 재임한 임기 중 몇 해동안 행한 고문의 일부일 뿐이다. 그는 퇴직할 때 시
당국으로부터 연금이 지급되었고 1634년에 죽었다. 슈미트의 일기에는 새디즘이나 잔학성이 엿보이는
구절이 전혀 없으며 매우 능률적인 일을 해낸 일개 '성실한 직공'으로 평가받는다.
이단심문관으로 명성을 날렸던 스페인의 프레이 토모스 데 트로케머더는 그의 스페인 이단 심문소장
재직 18년 동안 10만 220명을 화형에 처하고 9만 7,321명을 고문했다. 그러나 그는 예술로서의 고문을
통하여 이단심문관 가운데 가장 위대한 사람으로 평가받았지만 자기희생과 겸양의 생활을 보냈다.
독일의 이단심문소장으로 임명된 슈르렌게르는 가장 유명한 고문과 조작의 전문가였다. 그가 죽은 후 몇
세기동안 마술 및 자백을 시키는 방법에 관한 명저로서 유명한 '마녀의 망치'에서 "마녀의 존재를
믿느냐 아니냐를 피고에게 묻도록 하라. 믿지 않는다고 답변하면 그것은 이단의 설이라 즉각 처형할 수
있는 값어치가 있다. 믿는다고 대답하면 자신이 마녀가 아니면 어떻게 그것을 알 수 있느냐고 묻고
자백할 때까지 고문을 가하라."는 등의 심문기술을 적고 있다. 슈르렌게르의 추궁을 벗어난 마녀는 전혀
없다고 알려져 있다.
한국에서 가장 유명해진 고문전문가는 역시 이근안이다. 물론 일제시대 때부터 독립운동가를 고문하던
유명한 친일경찰들이 있다. 이들은 해방후 독립된 조국의 경찰, 헌병대, 특무대 등에 다시 들어와 이
나라의 수사기관에 고문의 전통을 뿌리내리게 했다. 노덕술, 김창룡 등이 바로 그러한 자들이다.
이근안은 5공시대에 민주화운동가들을 많이 고문하다가 얼굴이 알려진 경우일 뿐이다.
그는 김근태 전 민청련의장의 사건에서 지독한 고문을 함으로써 유명해졌지만 실제 미스유니버스대회
폭파음모사건, 남민전 사건, 김성학 사건, 반제동맹당 사건, 전노련 사건 등 수많은 사건에서
'고문기술자'로 등장했다. 전기고문과 허리꺾기에 능했다는 "그는 항상 눈에 핏발이 서 있었으며
칠성판을 자신이 발명했다고 자랑하기도 했으며" "전기고문을 하는 도중에 부하직원을 시켜 라디오를
가져오게 하여 직접 다이얼을 맞춰 크게 틀곤 했다."고 한다. 이들로부터 고발을 당했지만 성의 없는
당국의 조치로 아직도 검거되지 않고 있다.

⑥ 이단 심문소와 정보부 또는 안기부

이단 심문소와 이단재판소는 교회와 교리를 수호하는 기구였기 때문에 엄청난 권한과 권력을
행사하였다. 적법절차나 피의자권리가 이 기관에 의해 이 기관에 의해 존중되거나 존중해 주기를 바랄
수 없었다. 불쌍한 마녀들은 이 기관에서 제대로 변소 한번 하지 못하고 진짜 마녀가 되어 갔던
것이다.
국가보안법은 한 국가의 형법체계 속에서 가장 중요한 법률로 인식되었다. 국가보안법 사간이 경찰,
검찰, 안기부 등에 의해 취급될 수 있었지만 기본적으로 그것은 안기부의 지휘 통제 아래 있었다.
안기부는 국가보안법 사건을 '조정'이라는 이름 아래 수사의 주제자인 검찰을 사실상 오히려
'상명하복'관계에 두고 있었다. 국가보안법을 실질적으로 다룰 수 있는 기관이 가장 상위의 힘있는
기관이 되었다. 그것은 국가보안법이야말로 국가에 대한 반역이자 체제에 대한 도전세력을 처단할 수
있는 수단이기 때문이다.

⑦ 사상의 재판

마녀재판의 지침서라고 할 수 있는 '마녀들의 햄머'를 집필한 인스티토르와 스프랭거는 "다른 사람이
꿈속에서 당신이 무슨 일을 하는 것을 보았다면, 당신은 그 일에 책임을 져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마녀는 단지 생각만으로 남에게 해를 미칠 수 있다고 여겼기 때문에 그 '사악한 생각'도 처벌할 근거가
되었다. 마녀들은 이웃이나 동물에 구체적인 해악을 끼치지 않아도 마녀라는 사실 자체, 마녀로서
악마연회에 참석하고 악마와 키스한 것만으로도 처벌받아야 했다.
국가보안법 적용의 역사에 등장하는 사람들의 열전 가운데는 일기에 쓴 내용이 문제되었거나 농담으로
한 대화조차도 유죄판결을 받은 것이 있다. 단순히 책을 읽고 소지하는 것이 수없이 문제되었다. 몇
명의 학생들이 모여 토론한 것이 '의식화'라는 이름으로 처단된 사례는 예거하기조차 힘들다. 이른바
북한 우표수집사건이 바로 그러하였다. 단순한 자연현상조차도 마녀의 악의와 그에 기초한 결과로
몰아붙여 처단한 마녀재판의 광기와 다를 바 없었다. 이와 같이 행동만이 아니라 사상과 양심조차도
처단할 수 있는 것이 국가보안법이었다. 내면조차도 반공의 이데올로기로 무장할 것을 요구하였다.
꿈속에서도, 일기 속에서도, 소설의 초고에서도 허튼 소리는 허용되지 않았다.

⑧ 연약한 계층의 피해자

마녀재판의 피해자는 주로 어린 소녀나 중노년의 여성이었다. 77.7%가 젊은 여성이었다.
여성으로서의 마녀는 남성들이 보통 저지르는 강도, 살인이 아니라 해로운 저주를 하는 등 상징적인
범죄를 저지른다고 보았다. 그러나 실제 여성은 가장 연약한 계층으로서 이단심문소의 공격에 대해
방어할 능력을 갖추고 있지 못하였다.
국가보안법의 피해자 역시 사회적으로 가장 약한 계층 출신이 많았다. 국가보안법이 적용되지 않는
영역이 없었고 적용의 예외가 된 사람이 없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리하여 언론인에서부터 예술가에
이르기까지 지식인들이 광범하게 이 법의 적용을 받았다. 그러나 이들에게는 단순한 고무.찬양조항이
적용되었고 장기형을 선고받는 경우가 드물었다. 이른바 막걸리 국가보안법의 경우 평범한 시민들이
대부분이었다. 납북어부, 재일 동포, 간첩사건의 경우에는 가난하고 힘없는 서민들이었다. 이들은
제대로 변호인을 선임할 능력조차 없었고 더욱이 자신들을 스스로 방어할 능력이 없었기 때문에 제대로
변론의 기회가 없었고 중형을 선고받기가 일쑤였다.

⑨ 중형의 선고

위에서 보았듯이 마녀와 국가보안법위반은 다함께 체제유지에 위해를 초래한다는 이유로 중죄로
간주되었고 중형으로 다스려졌다. 마녀들은 대체로 화형 등 극악한 형벌에 처해졌다. 국가보안법
위반자들의 경우에도 비교적 엄벌을 받았다. 국가보안법 사건의 사형선고 인원과 반공법사건의 사형선고
인원이 1960년부터 1987년까지 사이에 우리 나라에서 선고된 전체 사형선고 인원의 17.1%, 5.6%를 각각
차지함으로써 그 비중이 절대로 높음을 알 수 있다. 사형이 아니더라도 무기형, 징역 10년 이상의
장기형이 쉽게 선고되었다. 이로써 이른바 '장기수의 나라'라는 조소 어린 표현이 인권운동가들 사이에
회자되었다 .

⑩ 이웃의 태도: 도발과 위증과 방관

마녀는 이웃의 농작물을 해치고 아이들의 유괴하고 질병을 가져오기 때문에 이웃사람들은 마녀의
처단을 바랐다. 순진한 농민들이 자신의 생존을 위협하고 해악을 끼치는 마을의 평화를 깨는 마녀의
존재를 좋아할 리가 없었다. 이 어리석은 농민들은 위정자의 失政에 다름 아닌 풍수해와 궁핍에 대한
책임을 결국 자신의 이웃, 자신의 처자에게 전가하는 데 앞장섰던 것이다. 위정자와 법 집행자에 의해
만들어진 마녀의 존재는 이들에게 마녀에 대한 증오와 공포심을 심어주었고 마녀의 처형에 더욱
앞장서게 만들었다.

많은 국가보안법 사건은 이웃 사람의 신고나 고발에 기초해 있다. 특히 막걸리반공법, 막걸리
국가보안법 사건은 같은 자리에 있었거나 전해들은 이웃과 친구의 제보에 의한 것이었다.
국가보안법으로 재판 받는다는 것은 바로 패가망신을 의미하는 것이므로 원수를 진 이웃사람들이
상대를 파멸시키기에는 안성맞춤의 죄목이었다. 또한 국가보안법 희생자들은 법률적 제재에 위해
공민권을 박탈당하고 평생 기관의 감시를 받게 될 뿐만 아니라 이웃으로부터도 소외당하고 접촉을 차단
당하였다. 한 번 찍힌 낙인은 영원히 제거할 도리가 없었다.

마녀재판이나 국가보안법 재판은 일반 민중을 분열시키고 이간시키는 역할을 톡톡히 해 냈다. 바로
자신의 담 너머 이웃과 마을 주민을 서로 의심하게 함으로써 虐政에 대한 투쟁과 단결의 여지를 없애고
말았다. "꺼진 불도 다시 한 번"보듯 이웃의 동태를 살피고 감시하고 고자질하게 함으로써 마녀재판과
국가보안법은 그 사회 내부 구성원을 분열시켰던 것이다.

다. 국가보안법현상의 정치적, 문화인류학적 의미

마녀재판에 대해 많은 역사학자들이 단순히 16-7세기 사람들의 비이성적인 미신의 소산 또는
마녀사냥꾼이나 판사들의 잔혹성에 대한 도덕적 분노를 서술해 왔다. 레키, 한센, 레아 등의 학자들이
바로 그들이다. 그러나 오늘날 이러한 이성주의적 학자들의 견해에 단순히 동조하는 학자들은 없다.
오늘날 마녀재판에 대해서는 사회학자 또는 인류학자와 같이 다른 영역에서의 연구가 축적되고
가미됨으로써 보다 다양하게 설명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피고인 또는 기소자들의 신분과 지위 등의
정보를 담고 있는 재판기록과 관련 문서들에 대한 분석으로 말미암아 마녀재판과 그 사회심리학적
현상에 대한 정교한 모습을 재현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러한 새로운 연구와 분석은 결코 마녀재판의
공포감을 경감시키거나 그 잔혹성을 미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단지 과거 마녀재판의 기소자들의 광기와
악행만으로 설명하려는 인상을 제거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어느 인류학자는 마녀재판이 기도하였던 최종의 목적이 무엇이었던가를 추적하고 있다. 하번 마녀로
지목되면 혐의와 그에 대한 증거는 만들기에 달렸다. 위에서 본 것처럼 체포될 당시 피의자가 지나치게
냉정을 지켜도, 또는 당황해 해도 결국 마녀가 되기에는 마찬가지였다. 즉 서로 상반되는 태도와 반응이
마녀의 전형적 특성으로 간주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하여 한 두 명의 희생자가 아니라 수천 수만
수십만의 희생자들이 생겨난 것이었다. 도대체 무엇을 위한 희생양이었던가?

"마녀사냥제도의 주된 결과는 가난한 사람들이 자기들은 영주나 교황의 희생물이라는 사실은 전혀
모르고 단지 자기들이 마녀나 악마의 희생물이라고 믿게 되었다는 것이다. 당신 네 암소가 낙태했다지?
당신 네 밭의 귀리는 잘 크지 않는다면서? 당신 네 포도가 시어졌다면서? 당신의 자식이 죽었다면서?
당신 네 울타리를 부수고 빚에 쪼달리게 하고 당신의 농토를 탐내는 자는 바로 당신의 이웃 …마녀로
변한 당신의 이웃이다. …백성들이 가공의 적들을 격퇴하자는 힘찬 켐패인을 교회와 국가가 시작했다.
…결국 마녀광이 지닌 실제적 의미는 마녀광란을 통해 중세 후기 사회의 위기에 대한 책임을 국가와
교회로부터 인간의 형태를 취한 가상의 괴물들에게 전가시켰다는 데에 있다.
고통을 당하고 소외되고 영세화된 대중들은 부패한 성직자들이나 탐욕스러운 귀족들을 저주하는 대신에
미쳐 날뛰는 악마들을 저주하게 되었다."

결국 가난하고 무력한 부녀자들에 다름없었던 마녀들은 교회와 국가, 성직자와 귀족들의 정치적 무능과
부도덕에 대한 전가된 책임을 지고 희생양이 되었던 것이다. 이들의 희생으로 말미암아 그 대신
성직자와 귀족들은 오히려 "간파해 내기 힘들 적으로부터 보호해주는 위대한 보호자"로서 인식되었다.
더구나 마녀소동은 "빈자와 무산자들의 가동능력을 박탈하고, 서로간의 사회적 거리감을 조장시키고,
서로 의심하게 하고, 이웃끼리 싸우게 하고, 모든 사람들을 소외시키고 공포에 몰아넣었으며, 불신을
고조시키고 무기력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더 나아가 마녀사냥제도가 유럽에서 제 3시대에 대한 예언과 메시아운동이 들끓듯 일어나기 시작한
무렵에 이노센트 8세가 인준하였던 거세 주목할 필요가 있다. 마법광란은 종교개혁의 후유증이 남아있을
때 그 절정을 이루었다. 메시아적 사회운동과 마법광란이 거의 동시에 진행되었다는 사실은 별로 힘들지
않은 수수께끼를 풀게 한다. 즉 마녀재판은 이러한 메시아적 사회운동의 기세를 꺾기 위한 의도에서
비롯되고 발전된 것이었다. 메시아적 신앙을 가진 타보르 종파나 재세례파등은 그들의 메시아 신앙
때문이 아니라 바로 마법을 사용했다는 이유 때문에 처단되었다.

국가보안법도 마찬가지로 하나의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만들어낸 틀이었다. 이 틀은 끝없이 희생자들의
요구하고 있었다. 그 틀을 운용하는 사람들의 개인적 승진과 출세라는 작은 동기를 벗어나
국가보안법이라는 틀은 수많은 사람들의 희생을 통하여 이 법이 지향하는 체제와 그 체제로 인하여
기득권을 누리는 사람들의 보호막이 된 것이다. 가끔 조직계보와 함께 큼지막한 사진으로 상징되는
사건의 발표 때마다 그 사진의 주인공들은 일정한 목적을 위해 봉사하게 마련이었다. 때로는 반공심리를
자극시켜 선서에서 안정희구세력의 표를 묶는 역할도 하고 또 어떤 때는 북한에 대한 경계심을 이용하여
사회에 무겁고 불안한 심리를 일으켜 쿠테타 권력의 안정과 정착에 활용하기도 하였다. 큰 간첩사건이
터지거나 간첩사건이 자주 터질 때가 대체로 이러한 정치적 목적이 필요한 때였다. 심지어는 미리
파악해 두고 있던 간첩사건을 일부러 시간이 지나 그 목적을 달성할 수 있을 때 터뜨리기도 하였다.

한편 기독교의 절대적 권위가 강화되면서 하나의 도그마가 되고 그에 반대되는 그 모든 것이 이단시된
것이 중세 유럽이었다. 마녀는 바로 기독교의 이단적 세력에 다름 아니었다. 동시에 남북의 분단이
강화되고 좌우대립과 상호적대가 심화되면서 국가안보의 이데올로기는 절대적 가치의 수준으로
올라갔다. 국가안보의 이데올로기는 하나의 도그마로서 그 어떤 국민의 희생이나 기본권의 제한을 위한
명분으로도 사용될 수 있었다. 이 도그마들이 깨지는 것은 그 외의 다른 가치들에 대한 고려,
상대주의적 인식의 전환 등의 계기에 의해서이다. 신의 권위에 대한 휴머니즘의 등장에 의하여
마녀재판은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졌고 국민의 기본권과 인권의 가치 부흥에 의해 국가보안법의 위력은
악화되고 있다.

4. 결론

"15세기에서부터 18세기까지 세 세기동안 벌어진 광란의 마녀재판만큼이나 공포로 가득 찬 인간 역사의
페이지는 없다."

서양의 마녀재판은 끔찍한 역사의 한 페이지로 기록되어 있다. 유죄로 판명 나 처형된 그 수십만
마녀들을 모두 무죄였다. 그 재판 자체가 명백한 오판이었고 범죄행위였다. 고문과 자백의 강요가 빚은
이 비극적 현상은 인류의 미망과 무지, 악의 속에서 핀 독버섯이었다. 많은 영사학자들이 그것은 특정한
지역의, 특정한 시대에 벌어졌던 특수한 현상으로 해석하고자 한다. 그러나 마녀재판은, 그 규모와
잔인성, 기간에 차이는 있을지언정, 모든 시대에 나타날 수 있는 심리적 현상이며 동시에 모든 사회가
저지를 수 있는 보편성을 지닌다. 우리는 전세계를 파시즘의 광란 속에 살게 하였던 2차 세계대전
직전의 독일의 나치즘과 이태리와 일본의 파시즘, 미국의 50년대를 사상적 황폐로 몰아 넣었던
메카니즘, 드레뷔스 사건에서도 같은 현상을 본다. 그 세대의 한 희생자였던 알지에 히스를 주인공으로
한 영화 '알지에 히스재판'의 해설자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한 시대를 주름잡은 '반공의 대의'에 편승한 조작극은 그 시대의 광기를 드러낸다. 이 영화는 그
광기의 시대를 심판한다. 30년이 지난 오늘, 메카니즘의 과오는 새삼스럽게 역사의 심판대에 오른
셈이다.

광기와 공란의 시대는 그로 인한 희생자를 낳게 마련이다. 집단적 히스테리에 빠진 사회와 국가가 그
구성원을 해칠 수밖에 없다. 바로 서양의 마녀재판과 우리의 국가보안법 소동이 바로 그러한 사실을
증명한다. 공정하고 이성적인 판단 대신에 적대와 분노, 그리고 선입견으로 한 개인과 집단에게 누명을
씌워 희생양으로 삼아 왔다. 법과 재판이라는 형식이 존재하지만 그야말로 그것은 형식일 뿐이다.
실제로는 법과 재판의 형식을 빈 야만적 그리고 사법적 살인에 다름 아니다. 그것을 통하여 무력하고
무고한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을 치러야 했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단지 무지하고 변덕스러운 대중의
흥분이나 방관에 의해 이러한 억울함이 생겨 났다기 보다는 지배자의 면밀한 계획 하에 벌어진 것임을
알게 되었다. 어쩌면 그렇게 서로 다른 시간과 공간에서 벌어진 일이 어쩌면 그리도 많은 점에서
유사성을 띄고 있는지 우리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현직 국회의원과 수천 명의 노동자, 학생, 시민들을 구속으로 몰고간 이른바 국시논쟁이니 좌경
용공이니 하는 말이 횡행하고 있는 것도 이 길고 어두운 역사를 지닌 빨갱이 귀신을 다시 불러내어 그
주술적 위력을 이용해 보려는 세력의 음모에 지나지 않는다면 틀린 말일까? …오로지 권력에만 눈
뒤집힌 자들이 대다수 민중들이 갈구해 마지않는 본질을 호도하고 지엽말단의 자구 몇 개, 몇 마디
구호를 침소봉대, 왜곡 과장하여 주술로 삼고 불러들인 저 어두운 시대의 망령이 초래할 참화를 이
시대의 민중들은 또 다시 고스란히 겪을 수밖에 없을 것인가."

'횡행' '빨갱이 귀신' '주술' '음모' '권력' '침소봉대' '왜곡과장' '어두운 시대' '망령' '참화'등 이
간단한 인용문에 등장하는 단어들이 모두 마녀재판의 시대를 연상케 하고도 남음이 있다. 그러나 이
'길고 어두운 시대'가 완전히 끝나지 않았다는 데 문제가 있다. 서양의 마녀재판은 오랜 과거의 일임에
비하여 국가보안법 재판은 오늘날 벌어지고 있는 바로 우리의 비극이다. 과거형이 아니라 현재진행형의
비극이다. 여전히 '고문'과 '조작', '프락치'와 '공작'이라는 단어가 사라지지 않고 있다.
서양에서는 바로 이 재판을 통하여 드러난 문제를 개선하는데 힘써 마침내 가장 선진적인 사법제도를
이룩하였다. 그 잔혹과 처참을 극한 비극의 땅에서 인간의 과오를 줄일 수 있는 사법제도가 발전되고
정착될 수 있었던 것은 역사적 아이러니라기 보다는 필연적 결과였는지도 모른다. 그러한 상황에서
수세기 전 백만이 넘는 무고한 부녀자를 화형 시킨 죄악이 더 이상 이 땅을 살고 있는 우리들의 것으로
되풀이되어서는 안 된다. 그것이 바로 중세유럽과 초기 미국사에 나타난 마녀재판이 우리에게 주는
타산지석의 교훈이 아닐 수 없다. 이제 우리도 문명이의야만의 짓, 푸닥거리 주술을 계속할 수는 없지
않은가


 박건태 우크라이나 tt.com  x  2015/12/14
 혼매직 퐐라한광산 bb.com  x  2016/0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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