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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두율 교수와 국가보안법 - 홍세화 칼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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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8/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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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두율 교수와 국가보안법 - 홍세화 칼럼
홍세화 칼럼 - 송두율 교수와
송두율 교수에 대한 가학적 여론몰이와 사법처리 요구 목소리가 계속되고 있다. 나름대로 열린 자세를
보여준 그에게 이 사회는 따뜻하게 반기는 대신 치욕과 절망을 강요하고 있다. 힘없는 한 지식인에 대한
이 사회의 가학증은 미국에 대한 피학증과 동전의 양면을 이룬다. ‘상전’ 미국한테는 간까지
‘바치’지 못해 안달하는 축일수록 북한에 ‘퍼주기’를 한다고 아우성치듯, 일부 정당과 언론 등
공익추구의 장에 똬리를 틀고 앉아 사익을 추구하는 집단일수록 송 교수 매도에 열을 올리고 있다.
반세기 동안 사익을 추구해온 수구세력에게 색깔론은 그들의 본모습을 감출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창이며 방패였다.
북한 노동당 서열 23위라고 그대들은 진정 이를 믿는가 그렇다면 그렇게 대우하라! 송 교수가 북한
체제의 일원으로서 북한 체제를 대변하는 고위급 인사라면, 국정원과 검찰에서 피말리는 조사를 계속할
게 아니라 그 지위에 합당한 대우를 하라는 것이다. 그래야 마땅하지 않은가. 두 체제의 정상이 만났고,
장관급이 거듭 만나고 있고, 각종 교류가 이어지고 있다.
북한 체제의 대표자나 대변자는 그가 ‘반국가 단체’의 수괴이건 구성원이건 ‘통신·회합’하고
‘잠입·탈출’의 대상이 될 뿐 단죄의 대상이 될 수 없다. 그런데 왜 유독 송 교수에게는 북한 체제의
일원이라면서 국가보안법의 제물로 만들려 하는가. 그래서 다시 묻는다. 송 교수는 북한 체제의 일원인
노동당 서열 23위인가 아니면 힘없는 개인에 불과한가 스물셋에 이 땅을 떠난 뒤 37년 동안 이방인으로
살아야 했던 존재, 학문적 업적과 문화적 정서를 ‘우리들’과 함께 소통할 기회를 갖지 못한 고독한
지식인인 그는 그 누구보다 민족이란 화두를 붙잡았다. 그의 민족은 ‘국익’이니 ‘국가’ 경쟁력이니
하는 말처럼 특정 계급이나 계층의 이익을 대변하면서 그것을 감추기 위한 말이 아니었다. 그에겐 오직
민족이 있었을 뿐, 대변할 특정 계층, 계급이 없었다.
그러나 그가 민족이라는 화두를 붙잡고 민족에게 다가갈 때 그를 맞은 것은 민족이 아니라 두 개의
적대적인 체제였다. 두 체제는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강요했다. 그가 민족이란 화두를 붙잡으면
붙잡을수록 그 요구는 더욱 강력하게 조여왔을 것이다. 그렇다면, 북한에 치우쳤던 송 교수의 과거를
민족을 화두로 붙잡았던 고립된 지식인이 민족과 만나기 위해 치러야 했던 조건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일까 내재적 접근법은 지식인인 송 교수 자신에게도 해당되어야 한다. 가령 ‘경계인’이 적절한
표현인지에 대한 판단도 우선 송 교수 자신의 몫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진보적 지식인이라 불리는 사람들조차 그의 노동당 입당 사실에 흠칫 놀라 뒷걸음질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국가보안법을 반대한다는 그들 자신이 국가보안법이 요구하는 ‘우리 편이 아니면
적’이라는 이분법적 냉전논리를 내면화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금 볼테르의 “나는 당신의 견해에
반대한다. 그러나 나는 당신이 그 견해를 간직할 수 있도록 끝까지 싸울 것이다”라는 말을 되새기지
않더라도, 송 교수의 견해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그에 대한 탄압에 동의할 수는 없는 일이다.
준법서약 제도가 폐지된 터에 사실상 전향서를 강요하고 이적성을 검증한다면서 그의 저서와 논문을
뒤지고 있다. 경제인들과 일반인들이 북한을 왕래하면서 북한을 이롭게 하는 ‘행위’를 버젓이 하고
있는 마당에 북한을 이롭게 하는 ‘표현물’을 찾으려 애쓰는 모습은 희극인가, 비극인가
‘이적 표현물’, 곧, ’북한을 이롭게 하는 표현물’이라고 판단하고 단죄할 수 있는 나라, 사상의
자유, 양심의 자유, 표현의 자유를 국가보안법에 저당잡힌 나라, 이 야만의 나라에서 마침내
‘개혁’적이라는 노무현 정권은 이라크 추가 파병을 결정하는 야만으로 화답하고 말았다.
홍세화 한겨레 기획위원 hongs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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