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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국    [릴레이기고]④국가보안법 전과자인 나의 기도-박영희- 2007/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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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일 대한민국 군 통수권자인 노무현 대통령이 버웰 벨 미군 사령관의 허가를 받아 군사분계선(MDL)을 넘어가고 있을 때였다. 그 광경을 지켜본 나는 허허, 혼자 웃고 말았다. 대통령이 월북하고 있었던 것이다.

텔레비전을 끈 나는 잠시 후 "저 분계선이 지난 반세기 동안 우리 민족을 너무 고통스럽게 하였다"는 대통령의 소감을 곰곰이 되씹어보았다. 벌써 사흘째, 소화제로는 듣지 않아 체내는 집을 다녀왔을 때처럼 내 입 밖으로 불쑥 튀어나온 건 다름 아닌 '국가보안법'이었다.

그러나 7년만에 찾은 자유, 그러나

1992년 세밑, 국가보안법은 나에게 잠입·탈출, 찬양·고무, 회합·통신 등 참으로 다양한 조항을 제시하며 15년 형을 선고했다. 이북을 이롭게 할 조직의 일원도 아니고, 이북을 찬양할만한 사회과학적 테두리마저 갖추지 못한 나로서는 감당하기 힘든 형량이었다.

그러나 재판을 다 마치고 교도소로 징역살이를 하러 갔을 적 나는 알 수 없는 여유가 생겼다. 어부로 일하던 도중 어디론가 끌려가 간첩으로 둔갑한 뒤 투옥된 장기수들에 비하면 내 형량은 그렇게 비싼 편이 아니었던 것이다.

다행히 나는 1998년 8·15 특사로 6년 8개월의 수형생활을 마치고 사회에 복귀했다. 거의 일곱 해만에 돌아온 바깥세상은 모든 게 신기하고 낯설었다. 검열 편지만을 써오다 내 손으로 직접 우표를 붙여 우체통 앞에 섰을 적엔 두 손이 떨리고 목이 메었다.

빠삐용이 갈구한 자유가 피부에 와 닿는 순간이었다. 아침에 눈을 떠 내 발로 어디든 갈 수 있고, 내 손으로 무엇이든 만질 수 있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꿈에 감옥만 보이지 않는다면 세상은 더없이 아름다울 것 같았다.

하나 그 자유는 오래가지 못했다. 국가보안법에서 풀려난 뒤 일주일쯤 지났을까. 3개월마다 주요 활동사항을 관할 경찰서에 출두해 서면으로 기록해야 하고, 통신·회합한 다른 보안관찰처분대상자의 인적사항과 그 일시·장소 및 내용을 그때그때 알려야 하고, 여행을 떠나기 전 필히 신고를 해야 하는 보안관찰법이 마치 계주를 하듯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집 장만 앞두고 있는 내가 '어려운 생활 때문에 보안관찰 갱신대상'?

나를 더욱 놀라게 한 건 2년 주기로 갱신하는 '피보안관찰 기간갱신 청구원인사실'이었다. 1998년 8·15 가석방 이후 나는 현재까지 피보안관찰 기간갱신 청구원인사실과 결정문을 네 차례 받았는데 그 사실 내용이 모두 한결 같았다.

나는 십여년을 맨땅에 헤딩하는 심정으로 글을 써왔고, 강연과 방송에 출연하면서 짬짬이 돈을 모아 셋방에서 전세로 옮겼다. 그리고 앞으로 2년 뒤에는 집을 장만할 계획까지 세우고 있다.

그런데도 대구지방검찰청의 청구원인사실에는 내가 여전히 어려운 생활을 하고 있으며, 교도소 복역 중일 때 안기부법 개정 반대 및 국가보안법철폐 등을 주장하며 불식투쟁을 벌인 바 있을 뿐 아니라 현재도 국가보안법 및 보안관찰제도의 폐지를 주장하고 있기 때문에 그 점을 들어 기간갱신함이 상당하다고 사료된다는 것이다.

물론 검찰청의 갱신사유에 시비를 걸고 싶은 마음은 없다. 검찰청의 생각이 그렇다면 나 역시 하루빨리 국가보안법이 철폐되어야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한국은 민주주의 국가이며 남북통일의 행보 역시 급물살을 타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구심을 떨쳐버릴 수 없는 건 어찌하여 변화하는 세기에, 그것도 무려 10년 동안 검찰청의 피보안관찰 기간갱신 청구원인사실과 법무부의 결정문은 토씨 하나 변화하지 않는가 하는 점이다.

기간갱신 때 던지는 검찰청의 질문도 나에게는 고통스럽다. 북에서 온 간첩이 만나자고 하면 어떻게 하겠는가? 북한 공산주의와 남한 민주주의의 차이는 무엇이며, 통일은 어느 쪽이 주도권을 쥐어야 한다고 보는가? 한국사회의 가장 심각한 점은 무엇인가?

한두 번 겪은 일도 아니고 해서 이 같은 질문을 받으면 나는 쓴웃음을 짓고 마는데 그건 다름 아닌 검찰청이 번갯불에 콩볶아먹듯 즉답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나 참, 이 엄청나고 방대한 문제를 어떻게 문답형식으로 처리할 수 있단 말인가. 그리고 내가 앉아 있는 이 곳은 검찰청이 아닌가. 이렇듯 내가 겪어온 국가보안법과 보안관찰법의 단답식 질문의 폭력은 가히 고문에 가까웠다.

여권신청해도 감감무소식... 글쟁이 밥벌이 끊는 국정원

2004년 10월에 있었던 일이다. 그날 나는 '정신대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의 직원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는데 중국 훈춘에서 위안부로 지내다 얼마 전 생을 마감한 한 할머니의  일대기를 써달라는 평전 청탁 전화였다.

다음날 나는 시청에 여권 신청서를 넣었다. 그러나 전화를 해주겠다고 한 시청 직원은 열흘이 다 지나도록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기다리다 지친 나는 직접 시청을 찾아갔고 나를 본 직원은 대구경찰청으로 전화를 걸어보라고 했다.

그의 말대로 대구경찰청과 서울경찰청으로 전화를 걸어 알아낸 건 내 여권신청서가 국가정보원에 손에 들어가 있다는 사실이었다. 20분 넘게 전화통과 씨름한 결과치고는 참으로 허탈한 순간이었다.

국정원으로 전화를 걸어 내 여권신청서가 그 곳에 넘어와 있다는 걸 확인한 나는 두 가지를 물었다. 여권신청서 심사를 마치는 소요시간과 해외여행에 관한 결격사유가 있는가 하는 점이었다. 그러나 음지에서 양지를 지향한다는 국정원 직원의 대답은 분명치 않았다. 해외여행에는 결격사유가 없으나 심사가 언제 끝날지는 자신도 잘 모르겠다는 소리만 반복했다.

그 소리를 들은 나는 "내 직업은 시인이고 글을 써서 밥을 벌어먹는데 그 밥줄을 지금 국정원에서 끊으려하고 있다"며 목청을 높였다. 보안관찰법 제 20조에도 본인의 건전한 사회복귀를 위하여 취업 알선, 환경 개선 등 필요한 원조를 하도록 되어 있기 때문이다.

국가정보원과 실랑이 끝에 여권과 비자는 6일 만에 발급되었다. 시청과 두 경찰청을 상대로 벌인 실랑이를 합하면 출국 전 이미 나는 지쳐있는 꼴이었다.

"이북민을 만나지 않게 해주세요"

더 큰 난관에 부닥친 건 출국한 뒤였다. 길림성 훈춘시에서 위안부로 지낸 할머니는 그 뒤 거처를 이북으로 옮겼는데 그곳에서 지낸 시간이 무려 십여 년이나 되었다. 나로서는 예상치 못한 장벽을 만난 셈이었다. 함경도 청진에서의 이야기를 빠뜨릴 수 없었던 나는 우선 조선족을 대상으로 접근을 시도해보았다. 그러나 별다른 진전은 없었다.

물론 길이 전혀 없는 건 아니었다. 청진에서 중국으로 넘어오는 이북민을 만날 수 있다면 일은 쉽게 풀릴 수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 길을 포기해야 했다. 곳곳에 지뢰처럼 국가보안법이 도사리고 있었던 것이다.
  
한 시인과 국가보안법의 불행한 관계는 그 이후로도 계속되었다. 만주를 배경으로 한 항일운동과 관련한 글을 쓰고자 두 차례 더 중국을 찾은 나는 제일 먼저 답사를 무사히 마치고 귀국하는 그 날까지 이북민을 만나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그런데도 중국과 지척인 이북민은 심심찮게 내 눈에 띄었다. 함경북도 남양과 마주보고 있는 도문대교에 갔을 적엔 북에서 넘어오는 이북민을 코앞에서 목도했고, 국경을 넘어 몽골로 향하는 열차에서는 이북 출신 벌목공과 한 침대칸에서 꼬박 한나절 반을 함께 보낸 적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무거운 짐을 양손에 든 그를 모른 척 할 수밖에 없었고, 혹시 그가 말을 붙여올까 봐 지레 겁을 먹기도 했다.

한 인간을 비겁하고 비참하게 만드는, 씁쓸하기 짝이 없는 그 절망감을 어떤 은유로 대신할 수 있을까. 자라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고 국가보안법은 나에게 이 같은 후유증을 남겨놓았다. 상대는 물론이고 나 자신을 검증하게 만들고 심지어는 대인기피증을 유발하기도 한다. 어디 그뿐인가. 이북에 즐거운 일이 있어도 흔쾌히 웃을 수 없고, 수재의연금을 건네는 것조차 두렵다. 잠시 웅크리고 있는 저 국가보안법이 언제 또 나를 덮쳐올지 모르기 때문이다.

눈물 젖은 두만강

가슴팍에 철근 심은 시멘트 다리 위로
여자 하나 넘어온다
작달막한 키에 잔뜩 웅크린 얼굴빛,
여자의 굽은 허리가 인화과정을 마친 사진처럼 선명해진다
이순이나 되었을까,
달려가 양손에 든 보따리 받아주고 싶어도
마음뿐, 나는 구경꾼으로 서 있어야 한다
어디서 무얼 하며 식솔은 몇이나 되는지 물어서도 안 된다

말이나 통하지 않으면 얼마나 좋으랴
얼굴을 닮지 않았다면 또 얼마나 좋으랴
아서라, 저 여자가 방금 넘어온
다리 건너 저 나라를 시적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
소설가적 입장도 위험하기는 마찬가지다

아주 오래 전
아버지는 저 강을 건너온 여인과 온밤 지새며
뒹굴었을지라도 너는
저 여인과 말을 섞거나 손을 잡아서는 안 된다
더더욱 눈이 맞아서는 안 된다


덧붙이는 글 | * 작가회의 소속 시인인 박영희 기자는 시집 <즐거운 세탁> <팽이는 서고 싶다>, 르포집 <아파서 우는 게 아닙니다> 등을 펴냈습니다.  

2007.10.15 18:51 ⓒ 2007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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